경제·금융

[김승웅 휴먼칼럼] 가족 이기주의의 악취

지난 일요일 전주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무궁화호 안에서의 일이다. 논산을 지날 무렵 30대 중반의 부부가 열차에 오르더니 자리를 좀 바꿔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부부가 합석하겠다며 나더러 건너편 젊은이 혼자있는 자리로 옳겨달라는 주문이었다.건너편의 젊은이를 힐끗 보니 눈매가 왠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부부 역시 그 눈매를 읽은 탓일까, 아니면 내 인상이 그보다 순(?)하다고 여긴 걸까, 나더러 한사코 그 젊은이 옆으로 가달라는 강청이었다. 순간 미국에서 곧잘 듣던 속담 하나가 떠 올랏다. 『상냥한 사람은 설득하는데 도움이 된다(AN AGREEABLE PERSON HELPS TO PERSUADE)』 아, 나 역시 진작부터 불량한 눈매를 보였어야 했는데! 자리를 옮겨 줬지만 서울에 올 때 까지 내내 불쾌했다. 우선 나를 빤히 들여다 보며 졸라대던 매너가 싫었다. 하다 못해 말을 꺼내지 못한채 머뭇거리기만 했어도 선뜻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는 건데. 아니면 남편보다 아내를 내세워 나의 기사도를 자극하는 지혜를 보임직도 한데. 남자는 자리를 잡자마자 무슨 소설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책을 읽는 남편의 모습도 인테리처럼 보여 좋았고 그에 기대 잠을 자는 아내의 모습도 낭만적이라서 좋았다. 몇분 사이에 모든게 다 좋게 끝난 것이다. 나뻐진 건 나 하나 뿐이다. 그 몇분 사이로 끝나지 않고 서울에 올때 까지 3시간 남짓 계속 화가 나 있었다. 기차가 영등포 역에 이를 무렵 나는 당초 서울역 하차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차를 서둘렀다. 짐을 챙기는 척 부부앞에서 잠시 서 있었던 것은 혹시라도 감사했다는 인삿말이도 듣고 싶어서 였으나 부부는 계속 창밖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예의 낭만적인 몸짓과 표정으로. 가족 이기주의 탓이다. 인간 만사 모두 이기주의적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아무리 성찬이지만 식사 후의 음식찌꺼기가 너절하듯 가족 이기주의도 가능한한 빨리 감추고 빨리 치워야 정석이다. 가족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부모들의 구멍난 어린애 단속이다. 어린애를 사랑하는 만큼 버릇없는 애는 미워해야 옳다. 그것이 공평이다. 백점 맞을 애 한테는 1백점을, 빵점 맞을 애한테는 빵점을 줘야 한다. 둘다 백점을 주는 것은 공평이 아니다. 식당이나 전철속에서 버릇없이 날뛰는 애들을 볼 때마다 예의 공평을 생각한다. 물론 애들을 나무래는 부모도 없지 않다. 허나 나무래는 표정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을 나무램이 이웃에 대한 사과나 애들의 버릇을 잡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그렇게 키워야만 기가 안죽고 담력이 느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공평이 저지르는 착각과 같다. 설령 그렇게 키워 기를 살리고 담력을 늘렸다 치자. 그게 진정한 의미의 기와 담력인가. 깡패의 독기와 조용한 전사(戰士)의 용기는 구별돼야 옳다. 깡패는 결코 용사가 되지 못한다. 월남전에 장교로 참전했던 친구의 말이 새롭다. 깡패가 군인이 되면 다른 전우들을 때리고 괴롭히는게 농사일뿐 정작 적과의 접전이 시작되면 뺑소니 치거나 뒤로 처질 궁리만 하더라는 중대장 시절의 목격담이다. 깡패의 특징은 남의 이목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제 잇속 제 살길만 찾는 뻔뻔함이다. 애들을 버릇없이 방목하면 최악의 경우 뻔뻔함만 추구하는 깡패를 만든다. 지식층이 돼도 무언의 폭력을 일삼기 마련이다. 말로, 글로, 행위로, 심지어는 시선으로 까지 폭력을 휘두른다. 기와 담력을 뻔뻔함과 착각한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착각이 시정되지 않은한 자자손손 대물림한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저지르는 여러 추태는 바로 한국형 가족 이기주의가 그 모태다. 이 추태의 시정을 위해 최근 모 일간지가 연재하는 「글러벌 에티켓트」를 읽으며 그 소재 선정과 타이밍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아쉬움을 느끼는 건, 추태의 사례만을 들추기에 연연할 뿐 정작 그 해법 제시에 등한하다는 점이다. 부모가 먼저 바뀌지 않는 한 「어글리 코리언」의 라벨은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우선 전철을 타고 내릴 때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오르려는 작태 하나만을 두고 보자. 가깝게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가르칠 교사가 없고 교사들 스스로가 그리 성장했다는 것, 멀게는 역시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잘못 알고 살려 준 기와 담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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