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이 전혀 없는 관계에서도 사랑은 성숙할 수 있을까?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본 적도, 함께 시간을 보낸 추억도 전혀 없는 상대방을 어디까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는 '헌신'은 미덕일까, 집착일까, 범죄일까? 전혀 미래가 없는 사랑에 절망해서 떠난 사람은 비난받아야할까?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2002년작·포스터)를 보고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랑, 참 어렵다..
스페인의 강렬함을 그대로 담은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사뭇 다른 사랑이야기다. 마르코는 인터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여성 투우사 리디아를, 베니그노는 우연히 알게된 발레리나 알리샤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지만, 두 여인은 뜻밖에도 코마(식물인간)상태다. 같은 고민을 갖은 두 남자는 병원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지만 일상은 완전 다르다.
마르코는 교감할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며 하루하루 지쳐 리디아를 떠나지만 짝사랑하던 알리샤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돌보게 된 베니그노는 오히려 행복해보인다. 베니그노는 마치 알리샤가 진짜 연인인 것처럼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해주고(대화를 하는 것처럼)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매일매일 아름다운 알리샤의 몸을 닦아주고(육체적 교감도 하는 것처럼) 보살펴준다. 만약, 코마상태가 아니었다면 베니그노가 알리샤와 이렇게 매일매일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알리샤의 아름다운 몸을 매일매일 만지고 느낄 수 있었을까? 꼼짝할 수 없이 오로지 자신만 의지하고 있는 이 상태를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살짝 들 무렵 사단이 벌어진다. 알리샤가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코마상태에서도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임신과 출산 과정을 통해 기적적으로 코마상태에서 깨어난다는 것도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관객들은 과연 베니그노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혼란스럽다.
아무것도 모르는 코마상태의 환자를 간호사가 성폭행한걸까?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다보니 마치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한 잠깐의 실수?사랑일까...영화에서는 베니그노를 법으로 처벌했다. 하지만, 베니그노가 범죄자라고 쉽게 동의하기 힘들다.
이 영화가 보고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베니그노가 알리샤를 지고지순하게 보살펴온 오랜 시간은 아무것도 아닐까? 결과적으로 알리샤가 출산과정에서 코마상태를 벗어난 것은 의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베니그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은 아닐까?
베니그노는 수감생활 중 알리샤가 출산 중 사망했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듣고 자살한다. 알리샤가 깨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정말 기뻐했을까?) 대화 한번 해보지 못하고(알리샤가 베니그노를 사랑했을까?) 세상을 떠난 베니그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아프다가도 어쩌면 베니그노는 알리샤와 가장 행복한 사랑을 나눴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또 생긴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차피 사랑은 상상속에서 가장 완벽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천재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 한 편에서 '사랑에 관한 진지한 질문' 모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영화의 힘은 엄청나다.
조휴정 KBS PD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