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까지 필기구는 잉크를 묻혀 쓰는 펜과 연필이 전부였다. 그나마 종이 재질이 형편없어 쉽게 구멍이 나거나 찢어졌다. 그러던 중 외국 종군기자들이 사용한 필기구가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잉크를 찍지 않고 전혀 번짐 없이 술술 미끄러지듯 글씨를 만들어내는 이 마법의 도구는 '기자펜'이라고 불렸다. 볼펜은 그렇게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국산 볼펜의 시작은 지금도 국민 필기구로 애용되고 있는 그 유명한 '모나미153'이다. 광신화학공업사 창업자인 송삼석 회장이 1962년 국제문구전시회에서 처음 보고 들어와 기술제휴와 자체 개발을 통해 1963년 5월1일 내놓은 작품이다.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특허가 출원된 이래 20년 만에 우리 힘으로 만든 것이다. '나의(Mon) 친구(Ami)'라는 뜻을 가진 모나미 볼펜은 당시 시내버스 차비와 같은 15원에 출시된 후 필기구 시장을 평정하면서 국민 볼펜으로 자리 잡았다. 1968년에는 회사명을 아예 모나미로 바꿨다.
△볼펜이 사랑을 받은 데는 저렴한 가격이 큰 몫했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볼펜 가격이 1,000원을 넘지만 모나미153은 3분의1가격인 300원만 주면 600~700m까지 쓸 수 있다. 디자인도 큰 역할을 했다. 외국 볼펜은 대부분 뚜껑을 열고 닫는 구조이지만 이 제품은 손가락으로 뒤쪽의 버튼(노크)을 누르면 된다. 핵심부품인 '볼'도 스틸에서 텅스텐으로 바꿔 수명을 8배나 늘렸다. 우수한 품질에 편리하면서 가격까지 싸면 언제나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증명한 셈이다.
△모나미153이 출시 50주년을 맞았다. 학생과 교수는 물론 사무직의 무기로 개발시대를 달려온 모나미153의 누적 판매량은 36억자루. 이으면 지구를 12바퀴 돌 수 있는 수량이다. 하지만 지금 국민 볼펜은 위기를 맞고 있다. 하루 평균 120만개에 달했던 생산량은 컴퓨터와 프린터, 인터넷에 밀려 현재 20만개 수준까지 떨어졌다. 머지않은 세대에는 볼펜이 뭐냐고 묻는 아이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고이 간직해둔 추억이 자꾸 사라지는 게 공허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