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인출 소동과 77개 은행(전체의 10%) 도산. 1927년 일본 쇼와(昭和) 금융공황의 파장이다. 속으로 남긴 상처는 훨씬 컸다. 관료가 주도하는 재벌 중심의 경제정책이 이때 뿌리내렸으니까. 공황의 배경은 경기과열과 관동대지진. 유럽이 전화에 휩쓸린 1차대전의 반사이익에 따른 활황이 꺼져갈 무렵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복구하기 위한 특별어음이 공황의 불을 댕겼다. 혼란이 처음 드러난 곳은 정치권. 규모가 급증한 특별어음을 정리하기 위해 국채발행에 합의한 직후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특별어음의 혜택이 지진과 관련이 없지만 여당과 친한 특정 기업에 돌아갔다는 루머가 사실로 확인됐던 것.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진 가운데 대장성 장관이 상태가 좋지 않은 일부 은행을 두고 ‘파산했다’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실언이 나온 1927년 3월14일 이후 예금인출자가 장사진을 쳤다. 사태는 중앙은행이 특정 은행에 대한 자금지원을 거부한 4월 중순 이후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지급정지와 은행휴업령이 발동되고 내각이 물러났다. 중앙은행은 뒤늦게야 자금지원책을 발표하고 마구잡이로 돈을 풀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뒷면이 백지 상태인 지폐까지 찍어대 중앙은행의 대출이 한달 사이 10배나 늘어났다. 결국 인출사태는 가까스로 막았지만 물가고가 찾아왔다. 수혜자도 있었다. 재벌이다. 대형화ㆍ건실화를 명분으로 주요 은행을 차지한 재벌들의 힘이 더욱 커졌다. 조선에서는 본토보다 엄격한 은행법이 시행돼 민족금융자본의 출현이 봉쇄됐다. 정경유착과 고위관료의 실언, 중앙은행의 판단착오가 맞물린 쇼와 금융공황은 정치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일본은 군사ㆍ행정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로 변해갔다. 군인정치는 패전으로 사라졌지만 행정관료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구조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