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2월28일] 뤼미에르 형제

1895년 12월28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카페 지하 인디언 살롱. 문화예술인 33명이 모였다. 초청 케이스지만 입장료로 1프랑씩 받았다. 불이 모조리 꺼지고 필름이 돌아갔다. 3분짜리 무성영화 ‘시오타역에 들어오는 열차’는 관객을 사로잡았다. 열차가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놀라서 도망가는 관객도 있었다. 사상 최초의 상업영화는 이렇게 닻을 올렸다. ‘영화의 아버지’라는 영예도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독일에서 2개월 전에 상업영화가 시작됐다는 증거도 있지만 문화사는 뤼미에르 형제를 효시로 쳐준다. 사진사의 아들인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에 착안한 것은 1894년. 에디슨 영사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형제는 한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영사기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치의 개발에 들어간다. 에디슨도 대중용 영사기를 개발해 냈지만 개인용 영사기의 판로가 막힐 것을 염려해 특허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시네마토그라프’ 영사기는 위력을 발휘했다. 관객 2,000명을 넘은 날도 많았다. 기업화는 못했지만 형제는 이 때 번 돈으로 평생을 필름 제작과 영상기법 개발로 지냈다. 뤼미에르 형제의 유료영화는 전세계에 자극을 불어넣었다. 상업영화가 처음 선보인 지 불과 10년 후인 1905년, 미국에만도 200여개의 영화관이 생겨났다. 1903년 미국인 에드윈 포터는 ‘대열차강도’로 돈방석에 앉기도 했다. 1912년 그리피스가 만든 ‘국가의 탄생’은 러닝타임이 159분에 달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최고의 부가가치상품으로 손꼽힌다. 2003년도 세계영화시장 규모는 668억달러. 한국시장도 1조4,000억원에 이른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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