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6월 11일] 참으로 감사할 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끔 다시 생각나는 환자들이 있다. 지난 1997년 IMF 위기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병원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성형외과 등은 한가한 반면 심장병 환자는 급증해 주말에도 수술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급성 심근경색으로 심장 기능이 떨어져 피가 폐에 고이는 바람에 대화가 힘들 만큼 호흡곤란 상태를 보이는 40대 중반의 남자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창백한 얼굴에 혈압이 낮고 식은땀까지 흘리는 것으로 보아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어 한 시간이라도 견딜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이 환자의 요구는 빨리 딸에게 연락해달라는 것이었다. 크게 뜬 양쪽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명보다 마지막으로 딸을 보고 싶다는 것이 소원이었다. 사연인즉 파산 선고를 받고 1년 전부터 노숙 상태로 지냈으며 부끄러워 가족에게 연락하지 못했다고 한다. 딸들은 곧 도착한다고 했으나 주민등록증도 의료보험도 아무 보증인도 없는 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일단 막힌 혈관을 다시 뚫어주는 것이 급선무인데 최소한 재료비만 900만원 정도 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소생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의료진들은 이 딱한 상황에 눈물을 글썽이며 과장의 결단만 바라고 있었다. 일단 과장이었던 내가 재정보증을 해 환자를 검사실로 옮기게 하고 응급시술팀을 가동해 사회사업사 등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연락을 하도록 했다. 잠시 후 10대 후반의 딸들이 도착했고 극적인 상봉으로 응급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퇴원할 때 정부 요양기관에서 좀 더 안정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퇴원 당시 그 환자와 딸들이 보내준 진심 어린 감사의 눈길에 가슴이 녹아내렸다. 이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끊임없이 걱정만 하다가 어느덧 늙어버려 힘든 인생이었다고 넋두리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나 한발 뒤에서 보면 참으로 감사할 일들이 많다. 의료보험도 있고 가족과 같이 지낼 수도 있고 어쨌든 누워 잘 공간은 있으니 말이다. 가끔 한번씩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지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나는 의사가 돼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에 감사한다. 또 옆에서 같이 눈시울을 붉힐 수 있는 동료들과 여러모로 치료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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