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숨진 미주지역독립운동가 安元奎, 安顯景, 金鉉九, 金東寓선생과 일본지역 姜相湖선생 등 순국선열 5명의 유해가 28일 국내로 봉환됐다.
순국선열들의 유해는 이날 오후 4시30분 김포공항에 도착, 서울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 임시로 안치됐다가 29일 오후 2시 대전국립묘지 현충관으로 옮겨져 金義在국가보훈처장과 安椿生광복회장, 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된다.
이로써 해외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179명중 62명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고 49위의 묘소는 현지에서 단장됐으며 68위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묘소확인작업이 진행중이다.
경기 파주에서 태어난 安元奎선생(1880∼1947)은 대한제국 말기 하와이로 건너가 1907년 현지에서 분산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해 조국의 국권회복과 한인동포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이어 미주 전역의 유일한 한인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1910년 경술국치후에는 대동공진단을 조직, 일왕에게 한반도 침략을 반대하는 서신을 발송하고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했다.
安顯景선생(1881∼1957)은 1903년 하와이로 이민, 1917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으로 활동한데 이어 1920년에는 임시정부 군무위원,외정분과위원으로 선임돼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金顯九선생(1889∼1967)은 자강회 회원으로 구국활동을 전개하다 190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대조선독립단에도 가입했으며 1932년에는 윤봉길,이봉창의사의 의거를 후원했다.
金東寓선생(1896∼1988)은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과 1937년에는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 대표로 선임됐으며 1943년에는 미주지역 '맹호군' 대원으로 활동했다.
姜相湖선생(1919∼1945)은 1941년 요코하마 전문대 재학중 창씨개명 및 한글폐지 반대운동에 앞장서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1944년 10월 일경에 체포돼 복역중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安元奎선생과 安顯景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金顯九선생과 姜相湖선생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金東寓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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