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1일] <1188> 9·11

9월11일 아침. 수도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범인은 알 카에다가 아니라 칠레 군부. 선거로 뽑힌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대가 1973년 초가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대통령궁에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인 오전9시10분,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방송을 내보냈다. ‘나는 항상 국민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아옌데는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소총을 들고 항전하다 머리에 실탄을 맞아 숨졌다. 미국의 지원으로 성공한 쿠데타 직후 칠레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시민 3,000여명이 학살되거나 실종되고 13만명이 감옥에 갇혔다. 10만여명은 아직도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쿠데타군의 명분은 경제난국 타개. 아옌데가 집권한 1970년 34.9%였던 물가 상승률이 3년 만에 508.1%로 뛰고 성장률은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경제난의 주요인은 미국의 봉쇄. 구리 재고를 있는 대로 풀어 칠레의 주수출품인 구리 국제가격을 떨어뜨리고 네슬레 같은 식품회사에 압력을 넣어 분유 수출까지 막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관료들을 물갈이하면서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규제완화와 정부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던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인 이들 ‘시카고 보이스’는 칠레를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칠레의 신자유주의는 과연 성공했을까. 평가가 극과 극이다. 외환위기를 겪자 1982년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스들을 퇴출시키고 동아시아식 통제경제를 접목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피노체트는 아옌데가 남긴 경제적 유산 덕분에 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아옌데가 국유화한 구리산업은 ‘칠레의 월급 봉투’로 불리며 수출의 절반가량을 채우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