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점 하나 설립에 5년·법인 전환은 기약도 못해
글로벌 은행에 밀리고 한국기업 대상 영업 포화
현지연구·대규모 투자없인 '맨땅에 헤딩' 불가피
"한국에서는 정관계를 막론하고 해외진출이 답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막상 현지에 나오면 국내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현지 지점 하나 설립하는 데 5년이 넘게 걸리고 법인 전환은 언제 될지 기약할 수도 없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만난 시중은행 현지법인 고위관계자는 '해외에 답이 있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해외진출 독려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현지의 벽은 너무나 높고 두텁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은행 실무자들이 느끼는 부담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국내 4대 은행장이 최근 1년 사이에 모두 물갈이된 상황에서 해외시장 공략의 성패가 이들의 성과를 측정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종이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또한 매년 두 차례씩 은행 국제화 정도를 측정하는 초국적화지수(TNI)를 발표하며 은행들에 채찍질을 가한다.
이와 관련해 중국 및 동남아 현지에서 만난 국내 은행 관계자들은 현지 사정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대규모 투자 없는 해외진출은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행태에 그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국내 은행의 한계가 아직은 분명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에 맞춤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제화된 통화가 없는 나라=해외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들이 앞다퉈 호소하는 어려움은 바로 달러 조달이다. 한국계 은행은 씨티은행과 같은 미국계 은행이나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글로벌 금융도시를 기반으로 한 은행들과 달리 달러 조달이 어렵다. 현지 은행 관계자는 "달러를 통한 무역결제가 90%를 넘는 상황에서 국내 은행들은 달러를 조달하기 위한 추가비용이 들기 때문에 조달금리 자체가 비싸질 수밖에 없다"며 "국내에서는 달러가 넘쳐나 해외주식펀드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방안까지 나오고 있지만 달러가 필요한 은행 해외법인들은 비싼 돈을 주고 달러를 조달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외국계 은행에 배타적인 현지 금융당국도 문제다. 인도네시아 금융당국은 최근 현지 한국계 은행의 한국인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통보했다. 인도네시아 현지인 채용을 늘리기 위한 현지 금융당국의 조치다. 하지만 이미 우리소다라은행, 하나·외환은행 인도네시아법인 등의 현지인 비율이 95%를 넘는 상황에서 이 같은 요구는 지나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지은행 관계자는 "현재도 10명 남짓한 한국인 직원들이 동분서주하는 상황에서 이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건 일종의 횡포"라면서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베트남 또한 상황은 비슷하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 한국계 은행은 현지 금융당국으로부터 현지 은행 인수를 권유받았다. 현지 은행만 인수하면 해당 은행의 면허로 단박에 법인 전환이 가능하다며 설득했지만 일단은 고사했다. 해당 은행 관계자는 "베트남 당국은 40여개 현지 은행 중 절반을 5년 내에 외국자본에 넘기는 게 목표"라며 "베트남 당국 또한 부실채권이 많은 은행 위주로 팔려고 하는데 이를 덜컥 인수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른다"고 밝혔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회계 기준이 국내처럼 투명하지 않아 부실 측정 자체가 쉽지 않다. 자잘한 행정 업무를 처리할 때도 현지 은행에 비해 서너 배의 시간이 걸리는 등 보이지 않는 문턱도 높다.
◇韓 기업, 글로벌 은행 먹잇감=동남아 시장은 현지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을 붙잡기 위한 국내 은행들의 각축장이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 삼성전자 등 한국계 기업과의 거래를 위해 은행들이 국내에서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현지 한국계 기업에 돈을 빌려주지 못하면 해외진출의 첫발을 내딛기도 힘든 현실 탓이다. 무엇보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하기가 어려워 국내 모기업의 신용도를 바탕으로 대출을 해주는 등 리스크 관리도 쉽지 않다. 이에 대해 베트남 현지 관계자는 "국내 기업과의 거래선을 활용하지 않고 현지에 나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라며 "HSBC나 씨티은행 등의 글로벌 은행들도 기존에 거래하는 업체를 따라 해외에 진출한 뒤 리테일로 시장을 키우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 같은 한국 기업 대상의 영업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현지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려 해도 이미 그들과 거래관계에 있는 현지 은행의 벽을 넘기 쉽지 않을뿐더러 해당 기업의 재무제표를 파악하기도 버겁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때 현지화를 이유로 해당 국가 은행과의 거래를 선호하는 추세 또한 한국계 은행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현지 은행에 비해 영업력이 제한적인 국내 은행의 역량 부족도 이런 상황을 부추긴다. 실제 싱가포르 시장에서는 외환은행을 제외한 시중은행들이 모두 '역외은행(offshore bank)' 등급이다. 역외은행은 풀뱅킹·홀세일 다음의 세 번째 단계로 할 수 있는 거래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다. 리테일 업무를 할 수 없는데다 자산 증가 역시 한계가 있다. 다양한 서비스를 빨리 처리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굳이 한국계 은행들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모두 'A-'정도인데 글로벌 기업들이 트리플A 신용등급을 앞세운데다 저리로 조건을 내밀면 한국계 은행들이 아무리 무리를 해도 글로벌 은행들의 기준을 맞출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말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면세점을 낸 호텔신라는 싱가포르 현지 은행인 UOB에서 3억달러 보증서 계약을 맺었다. 우리·신한 등 국내 시중은행들도 이 입찰에 뛰어들었지만 UOB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월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컨벤션홀과 관련한 대림산업의 7,100억원 규모 항만공사 금융지원 역시 UOB가 맡는 등 해외에서의 한국계 은행들 입지가 나날이 좁아지는 상황이다. /자카르타·싱가포르=김보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