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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왕궁, 닮은 듯 다른… 3국3색 '궁궐의 속살'을 만나다

경복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향원정의 모습. 뒤에 있는 산이 주산인 북악산이다.

자금성의 내부 모습. 대형의 석조건물들이 자금성의 모습을 크게 보이게 한다.

전통시대 일본을 지배하던 도쿠가와 막부 정권의 ''궁궐''이 있던 에도성의 혼마루를 천수대에서 바라본 전경. 현재는 일본 국왕이 거주하는 고쿄의 부속정원인 ''고쿄히가시교엔''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 서울 경복궁, 정도전 설계로 철저한 유교식 건설… 북악산 등 어우러져 장관

● 베이징 자금성, 유교·불교·도교 혼합 … 명·청시대 걸쳐 600년간 군주 거주


● 도쿄 고쿄히가시교엔, 막부정권 거주지 … 혼마루엔 전쟁으로 천수대만 남아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3국이 가진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각국의 왕궁이 있다. 한국의 경복궁(景福宮)을 비롯해 중국의 자금성(紫禁城), 일본의 고쿄히가시교엔(皇居東御苑ㆍ황거동어원) 등이다. 각기 해당 국가의 전통과 문화의 정수를 표현한다. 경복궁은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다. 현재 궁궐의 구조물은 전통시대의 약 40%에 불과하지만 유교를 정점으로 한 조선왕조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자금성은 중국의 궁궐이다. 다수의 궁궐을 가졌던 한국과는 달리 중국 수도에 소재한 유일한 궁궐이다. 명ㆍ청시대에 걸쳐 600여년간 군주들이 거주했다. 일본의 고쿄히가시교엔은 전통시대에는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막부정권의 거주지였다. 일반적으로 유교가 지배한 동북아시아 3국이지만 이들의 표현은 다소 다르다. 한국의 궁궐은 순수한 유교의 원형에 가깝다. 반면 자금성은 유교와 불교ㆍ도교가 혼합돼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군인(무사)들의 거주지라는 성격이 드러난다. 궁궐에서 아시아의 문화를 만나보자.

◇도쿄 고쿄히가시교엔=일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여전히 왕정체제다. 그래서 국왕이 존재한다. 국왕이 있고 지금도 궁궐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처럼 과거 궁궐을 일반인들에게 이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도쿄의 고쿄히가시교엔이라는 궁궐 유적이 공원으로 사용되는 것은 복잡한 역사의 흔적이다. 고쿄히가시교엔은 원래 1867년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을 사실상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의 거주지였다. 여기를 중심으로 주위는 에도(江戶)성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무너지고 그때까지 교토에 있던 국왕이 에도(도쿄)로 옮겨오면서 이 자리를 차지했다. 국왕은 자신의 새로운 궁궐을 에도성 한 귀퉁이에 짓고 '고쿄(皇居)'라고 불렸으며 원래 막부가 살았던 에도성의 핵심은 유적으로 남겨 '고쿄히가시교엔'이라는 이름으로 공원화했다. 즉 고쿄히가시교엔 지역은 과거 막부가 직접적으로 생활했던 '궁궐'이고 고쿄 등 주변은 이를 방어하던 외곽성벽의 안쪽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고쿄히가시교엔에 입장하는 데는 별도의 요금이 없다. 입구에서 단지 번호가 새겨진 플라스틱 패를 하나씩 준다. 이는 입장객 숫자를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데 불과하다.


고쿄히가시교엔의 정문인 오테몬(大手門)을 지나면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다. 이곳이 도쿄의 중심지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원래 목적이 막부의 성이었던 관계로 진입로는 오르막길이다. 길을 구분하는 성벽은 수m짜리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막부의 권력과 재력을 짐작하게 하는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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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m를 올라가면 너른 공터가 나온다. 바로 과거 에도성의 핵심지역인 혼마루(本丸)다. 막부의 궁궐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전쟁 중에 모두 파괴됐다.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혼마루의 가장 북쪽에 있는 천수각(天守閣ㆍ덴슈카쿠)의 기반석인 천수대(天守臺ㆍ덴슈다이)다. 천수각은 막부가 실제 생활한 건물로 지금은 3층 높이의 천수대만 남아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에도성을 짓기 시작한다. 이중 천수각이 완성된 것은 1638년이다. 건물만 5층으로 지상에서 58m나 되는 일본 내 최대 규모의 천수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허무하게도 겨우 19년 후인 1657년 화재로 전부 타 버렸고 이후 재건하지 못했다. 막부의 후계자들은 혼마루 내 다른 건물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서울 경복궁=경복궁이 완공된 것은 3국의 궁궐 중에서 가장 빠르다. 조선이 건국된 후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 1395년 완공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은 중국 고전인 시경에서 따왔다.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 정도전의 설계에 따라 철저하게 유교식으로 건설된 것이 최대 특징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북쪽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청계천을 내수(內水), 한강을 외수(外水)로 뒀다. 궁의 주요건물들은 모두 남향으로 돼 있고 전조후침(前朝後寢) 원리에 따라 업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들이 앞에 놓이고 생활하는 침전과 후원은 뒷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860년대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다시 복원된 것이다. 그는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고 경복궁은 결정적으로 수난을 당한다. 6ㆍ25전쟁도 파괴에 일조했다. 이후 정부는 중앙청(원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재복원에 들어갔다. 현재는 원래 궁궐의 40% 정도가 완성됐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어디선가 끊임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은 중국의 자금성과 많이 비교가 된다. 경복궁의 넓이는 43만㎡로 자금성(72만㎡)의 약 60%가 된다. 자금성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전통시대 전체국가의 크기와 인구 수에 비례하면 경복궁의 넓이는 상당한 것이다. 일본 고쿄히가시교엔의 현재 규모는 21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은 건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궁궐답지 않은 건물도 많다. 유교적인 경복궁에 불교풍인 민속박물관이 있고 또 거대한 주차장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복원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보인다.

◇베이징 자금성=중국 통일왕조 가운데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것은 원나라가 처음이지만 당시의 도성은 터로만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자금성은 명나라 초기인 1420년에 완공됐다. 수많은 화마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600년 전의 건물들이 큰 손상 없이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도 대단한 사건인 셈이다. 명 왕조가 무너지고 청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그대로 자금성은 사용됐다.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도 무너지고 1924년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가 퇴거한 후로 중국인들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점은 현재 자금성에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금성의 유물은 거의 대부분 대만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관에 가 있다. 일본의 중국 침략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국민당 정부가 자금성의 보물들을 옮겼고 결국은 대만으로 가져갔다. 때문에 자금성의 실제 모습을 온전하게 보고 싶으면 자금성 자체와 함께 대만의 고궁박물관을 모두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도쿄ㆍ서울ㆍ베이징=글ㆍ사진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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