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등 사후의 중국/조순승 국회의원·국민회의 정치학 박사(시론)

○사라진 「작은 거인」「작은 거인」 등소평은 1924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세번 실패했다가 오뚜기처럼 재기하여 1978년이후 죽는 날까지 그 직책을 초월한 최고권력을 행사하였던 세계역사에 볼 수 없는 무관의 황제였다. 그는 한번도 명목상의 최고지위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도 사실상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세계최다의 인구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위에 군림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당직으로는 정치국 상무위원, 정무직책으로는 부총리가 그가 가졌던 최고의 지위였다. 등은 집권후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1978년 사실상 중국공산당의 전권을 장악한 후 주석제도를 폐지하고 당 총서기제를 도입하여 호요방을 총서기에, 조자양을 총리에 임명하고 중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개혁·개방정책을 내세웠다. 보혁대결속에서 호요방이 실각하자 조자양을 총서기로, 이붕을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1989년 천안문사건이 터지자 조를 버리고 강택민을 후계자로 선택했고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89년이후에는 줄곧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였고 강택민의 취약한 권력입지를 강화하여 사후에도 큰 동요없이 그의 정책이 계속 추진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언제나 막후에서 권력을 조종하는 사실상의 실력자였으며 그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세계 정치사에 보기드문 실력자였고 실질적인 중국의 「태상황」이었다. 1978년 이후 19년간을 중국의 절대권력자로 군림했던 「불도옹」의 사후에 중국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세계의 관심사이기 앞서 인접국가인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등소평의 죽음이 보도될 때마다 학자들은 중국의 장래를 예측하곤 했다. ○개방정책 가속될 듯 이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낙관론자들은 그가 1989년이후 후계자인 강택민의 지위를 강화해 놓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없이 중국은 그의 개혁개방정책과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정책을 추진해 나감으로써 21세기에 가서는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의 출연을 예상하였다. 한편 비관론자들은 강택민은 등처럼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고, 뿐만 아니라 중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기와 비전도 없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등의 사망후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또한 개방정책이 가져온 불안요소들의 연쇄반응으로 인한 핵분열을 일으켜 중국은 약화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이러한 양극적인 견해는 현 중국의 장래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원속에 오랫동안 기반을 닦아왔기 때문에 김일성의 사후 3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버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이 구축한 강택민 중심의 집단지도체제는 등사후에도 4∼5년간은 잘 유지되리라고 생각된다. 금년 가을에 있을 공산당전국대회에서 권력의 재조정이 있기는 하겠지만 강택민국가주석은 당·정·군의 삼권을 장악하고 현재 진행중인 사회주의적 시장개방정책으로 중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할 것이다. 대한반도정책을 위시한 중국의 외교정책에도 큰 변동없이 현 정책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생각된다. ○민중봉기 가능성도 그러나 중기적으로 4∼5년후를 내다볼 때 중국의 장래가 장밋빛만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지금까지의 사회주의적 개방정책이 가져온 내부모순이 더욱 심각해져 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지도자들간 정책대결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 개방정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연안에 위치한 성과 그 혜택을 받지 못한 내륙 성들간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신생 자본가들과 농민들 사이의 알력 또한 심해질 것이다. 게다가 세계의 추세에 맞추려면 개방이 필수적으로 가져올 민주화운동은 1989년의 천안문사태같은 민중봉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현 권력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고령인 것도 문제가 된다. 강택민 주석이 70세, 이붕 총리가 68세, 주용기 상무부총리 68세, 전인대 상무위원장인 교석은 72세, 이서환 정치협상회의주석은 63세다. 연령적 자연도태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정책수행에 있어서는 언제나 강온파가 있게 마련이고 집단지도체제는 단일지도체제로 지향되어 가는 것이 정치사의 흐름이었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적 개방체제가 가져온 자기모순과 그리고 경제개발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인플레」현상때문에 민중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더욱 커지게 되는데, 중국도 예외없이 매년 10%이상의 인플레현상과 사회부패현상에 고민하고 있다. 저명한 혁명분석가 크레이튼이 말하듯이 혁명과 개혁은 그 창시자를 제단에 올려놓고 잡아먹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중국의 지도자들도 이 정치현상적 법칙에서 완전히 탈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금년 7월에 있을 홍콩 반환문제, 대만과의 통일문제, WTO가입문제, 일본과의 군비경쟁문제, 남동아의 자원확보문제, 남사군도와 조어도를 둘러싼 영토문제, 티베트·위구르족들과의 약소민족문제 등 등사후에 중국이 해결해야할 암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이 중국을 위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건만 역사적 발전은 언제나 순탄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 더 나아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등이후의 중국의 전도에 대해 좀 더 꾸준한 연구와 이해가 요구되는 시기를 맞이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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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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