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왕실은 23일(현지시간) 성명을 내 압둘라 국왕이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제가 왕위를 잇는다고 덧붙였다. 사우디는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초대 국왕의 유언에 따라 장자상속이 아니라 형제상속제를 채택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왕위에 오른 압둘라 국왕은 사우디 왕가의 여섯 번째 국왕으로 수년간 고령에 따른 건강 문제로 종종 치료를 받아왔으며 지난해 12월31일부터 폐렴 증세로 입원했으나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압둘라 국왕은 집권 10년 동안 '신중한 개혁가'로 평가된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그는 1995년 전임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실권을 잡았으며 집권 이후 민간경제 부문의 성장 촉진을 위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추진, 외국인 증시 개방 등 경제자유화를 추진했으며 직접선거, 여성 참정권 승인 등 개혁정책을 폈다. 이에 인구의 60%가 30세 이하인 사우디에서 젊은 층에게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신임 살만 국왕도 왕세제 시절 국방장관을 지내며 압둘라 국왕을 보좌해왔고 왕위계승 초기에 왕권안정이 가장 중요한 만큼 압둘라 국왕의 정책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이제 향후 가장 큰 관심사는 사우디가 세계 원유시장의 대표적 스윙프로듀서(전 세계 시장의 공급을 조절할 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국가)인 만큼 사우디의 권력이동이 원유시장에 미칠 영향이다. AFP통신에 따르면 22일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이 시간외거래에서 3.1%나 올랐다. 살만 국왕의 즉위에 따라 유가에 대한 정책 방향이 전환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사적 반등 수준일 뿐 원유시장에 큰 변동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살만 국왕 역시 기존의 산유량을 유지함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정책을 고수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줄리언 리 블룸버그 원유시장전략가는 "살만 국왕은 석유 및 천연자원 최고위원회의 부의장으로서 원유 정책결정권자의 위치에 있었다"면서 "이는 살만 역시 저유가에 동의한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압둘라 국왕의 사후 가뜩이나 요동치는 중동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중동과 서방 등에서 테러와 분쟁을 주도하고 있는 과격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급부상한 데는 사우디도 연관돼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압둘라 국왕이 민감한 시점에 세상을 떠나면서 사우디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고 우려했다. 살만 국왕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사우디 내부의 극단주의 침투 가능성에 대한 대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구나 최근 이웃 예멘에서 사우디의 지원을 받던 수니파 정권이 시아파 후티 반군의 쿠데타로 밀려나고 그 반작용으로 예멘 알카에다가 득세할 수 있어 여파가 사우디에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사우디가 오랜 앙숙인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의 핵 협상을 두고 이견을 보이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도 관심사다. 미국의 대표적 우방 사우디는 미국이 앙숙 이란과 핵 협상을 벌이는 등 관계개선에 나서는 모습에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반면 미국으로서는 IS 격퇴를 위해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은 상황에서 IS 격퇴 노력에 힘을 싣고 중동 정세를 관리하려면 이란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WSJ는 압둘라 국왕의 사망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유지에 기여하던 그의 단호한 결단이 사라졌다며 "이미 긴장상태에 있는 미국과의 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