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별걸 다 묻는 입사원서

가족 직장·종교·출신지역은 왜…<br>신장·몸무게서 결혼 여부까지 직무 관련없는 스펙·정보 요구<br>공공기관·대기업도 구태 여전


지난 7월 대기업 계열사 면접을 치른 박진용(26)씨는 이력서의 가족사항에 아버지 칸을 비워뒀다가 면접 내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 나와야 했다. 박씨는 "면접관들은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왜 사망한 건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3차까지 진행되는 면접에서 단계별로 계속 물었다. 가뜩이나 아픈 기억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내 채용에 그렇게 결정적인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직무 관련 경력이나 자격증 등에 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고용정책기본법 제7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ㆍ채용할 때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과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학교, 혼인ㆍ임신 또는 병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모집ㆍ채용과 이 같은 조건들은 전혀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용 기업이나 공공기관들은 여전히 입사서류에서 이 같은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28일 인천 수도권매립지공사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환경부 산하기관 국정감사에서는 수도권매립지공사의 신입사원 지원서류가 도마에 올랐다. 공공기관 신입사원 채용시 업무와 관계없는 스펙이나 개인 인적사항 관련 문항이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수도권매립지공사의 경우 가족 구성원의 나이와 학력, 직장은 물론 직위와 동거 여부 등 세세한 내용을 반드시 기재하도록 했던 것이다.

수도권매립지공사의 채용 문제를 지적한 환노위 소속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수도권매립지공사는 커리어케어라는 채용 위탁업체를 통해 지원서류를 받고 있는데 입사서류에 가족과 관련된 내용을 기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공기업조차 입사 지원자들의 정보관리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민간기업들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30일 취재진이 현재 공개채용을 진행 중인 일부 기업들의 입사서류 문항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개인의 역량과 상관이 없는 가족들의 인적사항을 적어야 했고 일부는 종교나 신체사항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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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KT&G와 교보생명ㆍ신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직업, 직장명, 직위까지 적게 하고 있었다. 특히 교보생명에서는 지원자 본인의 종교는 물론 키와 체중, 시력과 혈액형과 결혼 여부까지 적어내도록 했다. 한전원자력연료에서도 종교와 신장ㆍ체중ㆍ시력ㆍ혈액형 등 신체 관련 항목을 요구했다. 신세계 역시 가족 인적사항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었고 본인의 결혼 여부도 포함돼 있었으며 트위터 계정을 적는 난도 있었다. 이랜드그룹 GLOBAL ESI 인턴9기 핵심인재 채용에서는 이랜드 내 지인의 이름과 관계, 해당 지인의 직위, 사업부, 연락처, 어떻게 아는지를 구체적으로 작성하도록 하고 있었다.

구직자들은 정보를 적어 내면서도 과연 이 정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왜 필요한지 몰라 답답하다. 취업준비생 김미성(30)씨는 "정작 채용 기업들은 '창의적이고 성실한 인재' 같은 추상적인 채용정보밖에 안주면서 구직자에게는 어디에 쓸지도 모르는 개인정보를 꼬치꼬치 캐묻는다"며 "입사원서를 작성할 때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박탈감을 느끼지만 채용권을 갖고 있는 그들이 달라면 정보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 구직자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력서의 과도한 정보 요구에 대한 문제 제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청년유니온은 직무와 관련 없는 스펙이나 개인정보가 없는 표준이력서를 만들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올 1월에는 서울시 산하기관 인력을 채용할 때 출신 대학 등을 표기하지 않는 표준이력서를 사용하는 청년 일자리 정책 협약을 체결했다. 이 이력서는 주민등록번호나 성별ㆍ주소 등을 적는 칸이 없고 사진도 붙일 필요가 없다. 대신 최종학력과 직무 관련 경력과 교육 이력 등 최소한의 개인정보와 직무와 연관성 있는 정보만을 요구한다.

양호경 청년유니온 정책팀장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2~3년 전만해도 공공기관에서도 가족의 수입은 물론 본인의 재산까지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가족사항이나 신체조건ㆍ재산 등은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내용으로 이 같은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인권침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양 정책팀장은 "앞으로도 필수적인 정보만을 주는 표준이력서 사용이 확대되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박윤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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