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화학, 천연물 과학, 화학생물학, 생화학, 시스템생물학.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는 이 모든 학문을 동시에 다루는 전공이 있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캠퍼스의 생물화학 전공이다.
생물학, 화학공학, 생화학, 생명공학 전공자가 아니라면 ‘생물화학(Biological Chemistry)’이 정확히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이렇다 할 정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KIST에서 UST의 생물화학 전공 교수를 맡고 있는 김영수 박사에 따르면 생물화학은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로서 화학에 기반해 생명과학을 다룬다.
“화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생물학 분야에 응용할 수 있는 음식을 요리해 내놓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기초화학과 생화학, 신약개발, 생체 구조·기능 분석, 도핑 컨트롤, 프로테오믹스, 메타볼로믹스 등 생물에 응용 가능한 모든 화학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현재 생물화학 전공에는 추현아 책임교수를 포함한 52명의 교수진과 33명의 학생들이 화학과 생물학을 무기로 인류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줄 원천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연구소로서 48년간 국가 과학연구를 견인해온 KIST를 캠퍼스로 활용하는 만큼 교수진의 클래스는 가히 ‘최고’, ‘최강’을 자부한다. 단적인 예로 지금껏 교수진이 발표한 SCI급 논문은 추 책임교수는 물론 KIST 홍보실에서조차 숫자를 집계하기 어렵다고 한다. 1년간 30여편의 논문과 20~30건의 특허를 출원·등록한 교수도 있다는 게 김 박사의 설명말이다.
설비·장비 인프라 수준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생명과학의 꽃으로 불리는 신약개발 부문만 해도 5,000개의 시료를 하루 만에 처리하는 초고속 천연물 탐색(iHTac) 시스템, 900㎒급 핵자기공명장치(NMR) 등 R&D 전 과정에 걸쳐 다국적 제약사에 견줄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 아시아 1등 국가연구소대학을 지향하는 UST에 걸맞은 최강의 전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물화학 전공에서 현재 주력하고 있는 연구과제는 대략 4~5가지로 구분된다.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같은 뇌질환의 진단·치료제 개발, 뇌질환과 암 치료 효능을 가진 천연물 의약품 소재 개발, 임상시료를 분석·진단하는 분석화학, 그리고 나노입자를 이용한 암치료 타깃 물질 연구 등이 그것이다.
이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 기술을 들 수 있다. 이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유발 단백질인 ‘베타아밀로이드(β-amyloid)’를 혈액에서 검출해 치매를 진단하는 기술이다. 최근 김영수 교수팀이 쥐 실험을 통해 뇌의 β-아밀로이드 농도가 올라가면 혈액 속 β-아밀로이드 농도도 비례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복잡한 검사 없이 혈액 한 방울로 치매를 조기 진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김 박사팀의 강보람 학생(박사과정)은 “β-아밀로이드는 혈중에 극소량만 존재해 기존 병원 장비로는 분석이 불가하기 때문에 미량분석이 가능한 장비를 개발 중”이라며 “상용화가 이뤄질 경우 치매의 조기진단에 따른 막대한 사적(私的)·사회적 비용 절감과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또 “언제 어디서든 혈액 샘플로 치매를 진단할 수 있도록 휴대가 용이한 랩온어칩 형태의 나노 바이오센서 개발도 계획하고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랩온어칩을 종이 위에 구현한 치매 진단용 종이센서의 개발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일반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핑 컨트롤 역시 생물화학 전공에서 다루는 주요 연구주제다. 권오승 박사와 손정현 박사가 주도하는 KIST 도핑콘트롤센터에서 프로야구, 프로축구(K리그)를 포함해 국내에서 열리는 모든 국제경기의 도핑테스트를 책임지고 있는 것. 이 센터는 국내 유일의 세계반도핑기구(WADA) 국제공인인증기관으로 얼마 전 열렸던 인천아시안게임의 도핑테스트도 담당했다.
이렇듯 최고의 교수진과 최고의 연구 환경 아래서 학생들은 화학과 생물학을 넘나드는 진정한 융합연구자로 커나가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의 바이오마커 발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이세진 학생(석사과정)은 “학부시절 진로상담 중 UST 출신이셨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UST 입학을 결심했다”면서 “생물학과 화학이라는 두 전문분야를 섭렵할 수 있는데다 일반 대학원에선 접하기 힘든 대형 국책과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럽다”고 밝혔다.
이세진 학생은 석사를 마치고 알츠하이머 진단 키트나 치료제 연구기업에 취업할 계획이다. 이후 경영을 함께 공부해 알츠하이머 관련 제약기업의 경영진이 되고 싶단다.
강보람 학생의 경우 KIST에서 위촉연구원으로 일 하던 중 UST를 알게 됐다고 한다. KIST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점에 메리트를 느껴 UST에 입학했다.
“화학기술을 이용하면 생물학의 응용범위가 크게 확장됩니다. 두 분야를 아우른 융합적 지식은 복잡한 인체 생리현상의 이해와 신약물질 개발에 필수적이죠. 생물화학은 화학과 생물학을 상호 응용하고 융합하여 실험에 적용하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전공이에요. 출연연에 소속돼 있는 만큼 학과 공부에 국한되는 일반 대학원과 달리 의공학, 신경과학, 환경, 국방 등 다양한 분야와 활발히 교류할 수 있다는 부분도 장점입니다.”
김 박사에 의하면 생물화학 전공 졸업생들은 대부분 제약 및 화학기업의 연구소로 취업해 관련연구를 이어간다.
“화학과 생물이라는 양대 기초과학을 토대로 기초(이론)와 응용(실무)을 모두 마스터한 인재들인 만큼 업계의 선호도가 매우 높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출연연이라는 공간에서 실전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죠. 실무 해결능력의 ‘급’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