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만큼 신용사회의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도 드물다. 은행거래의 77%가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 등 전자금융으로 처리되고 주식의 63%가 인터넷으로 거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쇼핑할 때나 숙박업소에서 결제할 때 소액이라도 현금을 내지 않고 카드로 계산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럼 과연 우리나라가 선진 신용사회에 이르렀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297만명에 달하고 연간 파산신청 수가 3만9,000건으로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국민들이 진 빚의 무게가 좀처럼 줄지 않고 청년실업률이 여전히 높은 가운데 10대 청소년과 젊은 층의 과소비 조짐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 선진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업의 분식회계와 도덕적 해이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발표한 2005년도 부패인지지수(CPI)에서 158개 조사대상 국가 중 40위에 머물고 있다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뇌물공여지수(BPI)는 21개 국가 중 18위로 러시아ㆍ중국ㆍ대만에 이어 네 번째로 뇌물을 빈번하게 제공하고 있는 나라에 들었다.
신용카드와 인터넷뱅킹과 같은 인프라를 비교적 잘 갖추고 있고 경제규모와 교역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아직 참다운 선진 신용사회의 대열에 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선진 신용사회로 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 참다운 신용사회가 갖춰야 할 ‘신뢰(trust)’가 메말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는 한 나라의 복지와 경쟁력을 결정짓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했다. 설사 후쿠야마 교수의 정의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가 ‘저신뢰 국가’에 속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탈세ㆍ부정ㆍ비리로 인해 신뢰기반이 무너지면 상호불신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 비용 부담은 결국 국민 모두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승자가 되고 우리 모두가 바라는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서로 믿고 사는 ‘고신뢰 사회’로 하루 속히 나아가야 한다. 정부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과 경쟁의 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소비자는 분수에 맞는 건전한 소비생활을, 기업은 기업윤리에 충실하고 투명한 경영활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선진 신용사회의 숲은 신뢰의 토양 위에서만 비로소 무성하게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