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대부분의 회사가 직원들의 급여를 통장에 입금 시켜주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40대 이상 직장인이라면 직접 받던 월급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액수는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월급봉투를 받아 든 날의 뿌듯한 맛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 총각들은 호기 있게 `한잔`을 외치기도 하고 가정을 가진 이들은 안주머니를 꼭꼭 여미고 귀가를 서두르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집에서는 반찬이라도 한 가지 더 장만해 가장을 기다리고, 아이들은 집으로 들어온 아빠의 손에 과자 봉지라도 들려있지 않나 살폈다. 그러나 요즘은 급여통장 덕에 편리하긴 하지만 월급날의 설레임은 많이 줄은 것 같다.
예림당 창립 후 10여 년간은 직원들의 급여는 내가 직접 전달했다. 급여일이 공휴일이거나 출장과 맞물려있으면 미리 챙겼다. 그런데 직원들은 아마 한 가지 사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각자의 급여를 헤아려 봉투에 담으면서 가능한 신권으로, 한 장도 모서리가 구겨진 돈이 없도록 일일이 펴서 그것도 돈의 앞뒤가 뒤섞이지 않도록 같은 방향으로 가지런히 챙 넣었던 일을 말이다.
경리 담당자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돈을 준비할 때 일차적으로 손을 봐서 챙겨 왔지만 그대로 헤아려 담은 적이 없다. 돈에 낙서라도 있으면 신권이라도 제외시켰고, 간부직원부터 잔 심부름을 하는 아이까지 얼굴을 떠올리며 월급을 넣었다.
`이 친구는 기회를 봐서 좀더 올려줘야 될 텐데` `이 친구는 뭐 하느라 가불을 이렇게 많이 했을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하며 월급을 봉투에 담고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글을 정성 들여 겉봉에 썼다. 그리고 한 사람씩 불러 차 한잔 나누며 한달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근무를 하는데 불편한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장래 생각하는 계획을 묻기도 하면서 급여봉투를 건넸다. 결국 급여일은 직원들과 일대일 면담을 하는 날이었다.
이 때 직원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메모를 해 뒀다가 시스템으로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바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지체하지 않고 시정했다. 그런 점에서 명륜동에 작은 사옥이나마 빨리 마련하고자 한 것도 직원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줌으로써 그들이 느끼는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줘야 한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사무실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 넣었음인지는 몰라도 명륜동 사옥 시절은 그 어느 때보다 직원들은 일치단결했고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했다. 툭하면 잔업이었지만 모두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서로를 격려했고 일이 끝나도 돌아갈 줄을 모르고 잔디밭에서 씨름을 하는가 하면 사내에 설치한 탁구대에는 언제나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탁구 게임이 벌어지곤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난 언제나 그들 옆에 있었다.
직원들 대부분이 20대중반에서 30대 초반이어서 모두 젊은이답게 깨끗하고 열정적이고 솔직해서 그들 사이 로맨스도 전성기였던 듯 명륜동 시절은 많지 않은 직원 수에 비해 유난히 사내커플이 많이 나왔다. 여기에다 함께 일했던 직원 중에는 예림당을 벤치마킹해 직접 출판사를 내는 사람도 나왔다.
그 뒤로도 사내커플은 줄을 이었고 `독립 선언`을 하고 출판을 시작해 안정적인 기반을 이룬 사람들도 꽤 있다. 직원들의 애경사에 참석하면 옛날의 얼굴들을 더러 대할 수 있는데 언뜻 들으니 전원은 아니지만 과거 예림당 사내커플 모임도 갖는다고 한다.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은 직원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사람이 가장 중요한 건 당연한 이치다. 나는 언제나 나를 대신하는 직원들이 신이 나서 일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에 대한 자긍심도 필요하고 언제나 자발적이면서도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장님`이기보다는 `능력 있는 사장님`이 되고 싶었다. 여기에다 비전 있는 회사로 만들어 직원들 역시 비전을 갖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인생 설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그런 직장이 예림당이기를 바랬다.
<최인철기자 michel@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