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4일] 쌀값 통제령


1969년 1월24일, 정부가 쌀값통제령을 내렸다. 골자는 서울ㆍ부산ㆍ대구 등 3대 도시의 쌀값 전면통제. 시중에서 가마(80㎏)당 5,600원선을 웃돌던 소비가를 5,220원에 묶었다. 유통구조도 바꿨다. 쌀 반입 창구를 농협으로 제한하고 등록소매상에게만 판매자격을 줬다. 중간상을 배제한 것이다. 통제령의 당면 이유는 쌀값 폭등. 2년 연속 흉작 여파로 쌀값이 보름새 12%씩 폭등, 연간 관리목표인 5,325원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통제령은 효과가 있었을까. 반반이다. 당장의 급등세는 멈췄지만 1년 후에는 7,000원선으로 뛴 적도 있다. 부작용도 잇따랐다. 수천개 소매상을 감독하기 어렵다는 틈을 비집고 농협에서 싸게 공급받은 쌀을 대도시 이외 지역으로 빼돌려 차익을 누리는 상인도 생겼다. 1971년에는 쌀값이 1만원선을 넘기도 했다. 부작용을 예상했던 정부가 통제령을 강행한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쌀값이 안정되지 않는 한 경제성장이 어렵다는 상황인식이다. 저미가정책 기조는 농민에게 비싸게 사서 소비자에게 싸게 파는 이중곡가제도로 이어졌다. 쌀값통제령을 3공 식량정책의 분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이 때문이다. 맛이 없다는 소비자들의 외면에도 통일벼를 심지 않는 농민은 불순분자 취급까지 해가며 보급을 장려한 이유도 쌀값통제령의 배경인 저미가정책의 연장선이다. 시장개방과 쌀소비 둔화를 타고 쌀값통제도, 이중곡가제도 사라졌지만 남은 게 있다. 빚이다. 원금만 4조7,000억원에 이르는 양곡증권관리기금이 이때부터 쌓인 부채다. 농가 역시 빚에 허덕이고 있다. 당장 먹을 쌀 증산을 위한 동기 부여와 산업화를 위한 저미가정책이라는 상반된 정책목표가 사회적 비용을 낳고 후손들의 빚으로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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