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년 전쯤 `메멘토`란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플롯도 특이하거니와 내용 역시 종반부로 갈수록 반전의 정도가 강해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새롭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직 수사관인 주인공은 아내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다.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 것은 자신과 범인의 이름, 그리고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것 정도다. 중요한 단서까지도 쉽게 잊는 주인공은 범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한다. 즉, 묵고 있는 호텔, 갔던 장소, 만나는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를 사진으로 남기고, 항상 메모를 하며,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해둔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기억마저 변조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나중에는 진실조차 헷갈리게 된다.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고 기억하는 것을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2003년도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고, 기업체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 경영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무역인의 입장에서 올해의 화두 역시 경제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얼어붙은 국내경기와 달리 수출이 호조를 보여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지난달까지 두 자릿수의 수출증가율이 6개월째 계속됐고 무역수지 흑자가 98년 12월 이래 5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런 호조세를 반영해 지난달 28일에는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무역의 날` 4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수출액이 늘어난다고 마냥 좋아할 것만은 아니다. 왜냐면 수출업계의 채산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무역협회가 1,000개 수출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수출채산성이 호전될 것으로 보는 업체는 전체의 18.1%에 불과했다. 반면 악화될 것으로 보는 업체는 64.8%로 호전전망을 내놓은 업체보다 3배 이상 많았다. 계속된 두 자릿수 수출증가율과 5년만의 최대 흑자란 양지의 이면에는 채산성 악화라는 기억하기 싫은 음지가 있었던 것이다.
수출이 확대돼 무역흑자가 느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채산성 악화란 오래된 숙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눈 앞의 숫자에 장밋빛 해석만 되풀이하다가 현실을 잘못 본다면 큰일이다. 이제부터라도 중국을 뿌리치고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채산성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석영 (무협 상근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