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가 헤게모니를 일부 상실하면서 유로가 치고 올라오는 국면이 완연하다.” 아직도 영향력이 막강한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탄식이다. 그린스펀 전 의장이 말하는 달러는 단순히 ‘화폐’를 뜻하지 않는다. 바로 미국이 군사력과 함께 세계 지배 수단으로 사용했던 독점적인 금융질서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오는 11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공식 출범하는 중남미 중앙은행인 ‘남미은행’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국의 안방인 중남미가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반기를 들면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미국 경제와 달러화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전세계-미국 경제의 디커플링(비동조화) 심화=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경제 성장률과 미국 경제 성장률 간 상관계수는 지난 2000~2003년 0.97에서 2004~2007년 0.68로 떨어졌다. 세계 경제가 미국 경제 의존도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우선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의 내수시장이 커지면서 미국 수출 의존도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소비시장’으로서 미국의 필요성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역내 무역이 늘면서 대미 수출 의존도는 줄고 있다. 아시아 내 수출 비중은 2000년 33.1%에서 2006년 41.5%로 수직 상승했다. 유럽연합(EU)도 회원국 확대에 따른 역내 경제규모의 팽창, 중동계 자금의 유입, 내수 확대 등으로 미국과 경제 동조화 현상이 약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의 여파로 미국만 ‘나 홀로’ 경기가 둔화되고 있다. 올해 세계 경제는 3% 후반의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겠지만 미국 경제는 2%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 달러 약세는 기본적으로 실물경제에서 미국의 비중이 낮아지고 서브프라임 사태로 신뢰도가 떨어진 것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이 같은 미국 경제의 위상 하락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중국은 최근 미국 위주의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고 수입을 늘리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땅에 떨어진 달러화의 위상=2005년 이후 달러화 가치는 주요 통화에 비해 30%나 폭락했다. 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무역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약달러 정책을 선호하면서 미국 국채 등 달러 자산의 투자매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IMF에 따르면 전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 비중은 올 1ㆍ4분기 64.2%로 전 분기보다 0.4%포인트 떨어졌다. 1999년 이후 8년 만에 최저치다. 이로 인해 기축통화로서 달러화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심지어 산유국들은 원유 거래 통화를 유로화로 바꾸겠다며 미국을 위협할 정도다. 국제유가는 달러화로 표시되는데 달러 약세가 이어지면서 이들 산유국의 실질 구매력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달러화 약세로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면서 자국 통화를 달러화 가치에 고정시키는 페그제를 포기하는 국가들도 하나둘 나오고 있다. 올 5~6월 쿠웨이트와 시리아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도 달러 페그제를 폐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 홍콩에서도 달러 페그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새로운 경제질서 태동의 신호=미국으로서 더 큰 문제는 이처럼 자존심을 포기했음에도 무역수지가 줄어들고 제조업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라는 데 있다. 미국 정부는 연방 지출 감소나 복지혜택 축소 정책 등 인기 없는 정책을 쓰는 데 주저하고 있고 소비자들은 돈을 버는 대로 쓰는 데 바쁜 실정이다. 또 약달러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여 미국 경제의 침체를 부를 수 있다. 특히 미국 경제가 위축된 틈을 차이나ㆍ오일 자금이 파고들면서 미국 기업ㆍ금융기관 사냥에 나서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들어 개도국 자본이 주도한 인수합병(M&A) 규모는 1,280억달러. 선진국 자본이 개입한 1,300억달러와 맞먹는다. 부시 대통령이 최근 두바이 증권거래소의 나스닥 지분 매입에 대해 “진행 과정에 불편함을 느낀다”며 경계감을 표시할 정도다. 하지만 이를 막기도 힘들다. 차이나ㆍ오일 달러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지탱해주는 자금줄이기 때문이다. 권 수석연구원은 “파운드화 등 대체통화의 힘이 커지고 있어 달러화가 과거처럼 유일무이한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갖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로 몰려가는 등 다변화하고 미국 경제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새로운 경제질서가 형성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