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위성복 당시 조흥은행장 "기업 사정도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당국, 가시적 성과에 집착 은행 말도 안들어은행 덩치만 키우고 글로벌 경쟁력 제자리 김민열기자 mykim@sed.co.kr 사진=이호재기자 관련기사 김용환 "DJ '換亂극복' 선언 왜 서둘렀는지…"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 최종욱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유종근 "DJ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 이연수 "정부 '하이닉스 무조건 팔아라' 독려" 정덕구 "대선 휘말려 신종 경제위기 올까 걱정" 위성복 "기업 사정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 손병두 "대우그룹 몰락, 정부도 일부 책임있다" 김대송 "증권사 무분별 해외진출 리스크 크다" 이용득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강봉균 "대우, 구조조정 서둘렀으면 해체 안돼" “구조조정을 해야 된다는 원칙만 있었지 개별 기업의 사정은 모른체 몰고 가는 분위기였다. 무조건 청산을 하면 나중에 공적자금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데도 금융당국은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했다.” 위성복 전 조흥은행장은 외환위기 당시 기업ㆍ금융 구조조정에 대해 “사업성이 나쁘지 않아 경기가 조금만 회복되면 살아날 수 있는 기업들이 많았다”며 “그러나 금융당국은 기업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은행의 말보다 구조조정 성과만을 원했다”고 말했다. 김대중(DJ) 정부 초기 몇 안 되는 호남출신 은행장으로 ‘금융계 실세’로 알려졌던 위 전 행장은 “은행간 합병으로 대형화는 됐지만 지금 그 결과가 무엇이냐”며 “단기적으로 금융시스템은 안정됐지만 덩치만 커졌지 경영효율성을 꾀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의 혹독한 구조조정 이후 규모는 몰라보게 커졌지만 글로벌 경쟁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외환위기 극복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금융업은 해외 경제 여파와 국내 경기 환경에 여전히 민감하다”며 “경기가 조금만 나빠져도 바로 연동되고 은행 한 곳만 잘못돼도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글로벌 트랜드에 대한 내부대처가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계화 바람은 국제금융질서도 급격히 변화시켰다. 90년대 이후 IT의 급진전으로 세계화, 개방화 속도가 워낙 무섭지 않았나. 이런 변화에 맞춰 선진국들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발 빠르게 대응했지만 우리는 외형위주의 경영에 매달리면서 기업들이 잇따라 도산했다. 가슴 아픈 일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로 무장하고 금융산업에 대한 감독체계가 정비돼 있었다면 97년 당시 태국에위기가 왔다고 해서 우리도 덩달아 외환위기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완성하지 못한 실패가 IMF를 불러왔고 이에 대처하지 못한 기업, 금융이 연쇄적으로 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정부(YS)가 말로만 세계화를 했지 세계화가 이뤄진 부문은 대우 등 몇몇 대기업들이 해외에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시스템이나 국내 시장 개방 정도를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은 글로벌 시장이 아니었다. -조흥은행 100주년 당시 한보 사태가 터졌는데, 당시 기업들의 상황은 어땠는가. ▦한보가 위기를 겪은 것이 모두 두 차례이다. 첫번째가 수서사태 때였고 2차 위기가 97년이다. (97년) 1월에 당진 한보철강 부도 당시 조흥은행 부채는 5,000억원 정도였다. 제일은행은 자기자본금보다 많은 1조1,000억원의 여신이 있었다. 당시 어떤 은행이든 (한보에) 안 걸린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은행들이 서로 외형 경쟁을 해 온데다 관치금융에서 갖고 있던 여신관행이 오랫동안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외형을 부풀려 분식으로 대출을 받고 은행은 제대로 신용조사도 하지 않고 실적위주로 지원했다. 당시 외견상으론 없어졌지만 경제개발 우선정책, 부실산업정리 등의 이유로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원칙 없이 자금을 지원하는 사례가 일반화됐었다. 5개 시중은행이 모두 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정부가 은행에 혁신을 요구하지 않았고, 기업도 갖고 있는 자금문제는 (은행)차입만 잘하면 무조건 해결됐다는 식이었다. 한보 부도는 서막에 불과했다. 한보 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삼미 그룹 5개사가 일제히 부도처리 됐고 이어 진로, 대농, 기아 등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시작됐다. -워크아웃 제도를 통해 조흥은행의 주거래 기업인 인천제철, 유진관광, 쌍용자동차, 쌍용양회 등이 살아났는데. ▦인천제철, 유진관광, 쌍용, 아남산업 등은 회사의 사업성이 나쁘지 않았다. 경기만 어느 정도 유지됐다면 구조조정 등의 자구계획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조흥은행의 경우 거래 기업 가운데 과거부터 부실한 기업들이 많아 노하우도 갖고 있었다. 워크아웃 제도가 시행되면서 노하우를 갖고 있는 은행원 가운데 이미 명퇴한 사람들을 모두 (계약직으로)불렀다.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과 마찰이 많았다. 금감원은 법정관리나 청산 등으로 모두 없애라고 했지만 세부 실사를 해보니 약간의 지원만 해주면 살릴 수 있겠더라. 결국 기업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데는 기업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은행 아니냐. 감독기관은 기준을 설정하고 주거래은행에 그 처리방향을 맡겨야 했었다. 무조건 청산하면 나중에 공적자금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데도 당시 금감원은 가시적인 구조조정 성과를 원했던 것 같다. -대기업 연쇄 부도에 따른 막대한 부실 여신으로 조흥은행의 미래도 불투명하지 않았는가. ▦97년말 오랫동안 관계를 가져온 쌍용, 기아가 부도를 당했다. 이런 여파로 98년 2월16일 조흥은행이 금감원으로부터 적기시정조치를 받았다. BIS비율 8%를 넘어야 되는데 막상 조사를 해보니 6.5%까지 내려갔다. 이후부터 은행 구조조정의 압력이 시작됐다. 정상화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서 벤처 사업가로 성공한 유리시스템즈 김종훈씨와 접촉을 하기도 했다. 7월초에 홍석주(현 KIC 사장) 등 7명이 김종훈씨의 돈을 맞고 있던 윈스로 파트너스(Winslow Partners)라는 펀드회사와 일주일에 걸쳐 마라톤 협상을 했다. 윈스로 파트너스측은 조흥은행의 부실여신 추이를 감안하면 총 10억달러가 필요한데 5억달러는 우리가 투자할 테니 한국 정부가 동일한 액수를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환율로 따지면 2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금액은 조흥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금액(충북, 강원은행 제외)인데 이들의 예상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깨닫고 나중에 크게 놀랐다. 한국에 돌아와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부실규모를 모두 털려면 정부도 일정부분 도와줘야 된다고 설득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 만해도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없었던 데다 해외자본이 들어오는데 정부 자금이 함께 들어오는데 대한 인식자체가 없었다. -증자가 불발로 끝난 다음에 합병 배우자를 찾기 위해 여러 곳과 태핑(타진)을 했는데 ▦김종훈씨의 투자유치가 실패로 돌아가자 곧바로 ‘선 합병ㆍ후 외자유치’로 목표를 전환했다. 전임 장철훈 행장이 나응찬 신한은행장과 접촉했는데 (신한은행이)거부감을 보였다. 98년 7월 행장대행을 맡으면서 보람은행과의 합병에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보람은행 주주는 두산과 LG였는데 조흥은행이 다가서자 하나은행이 두산을 통해 보람과 합병하는 계기가 돼버렸다. 그 다음에는 주택은행에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 행장대행으로 있던 윤영석 전무와 상과대학 동기여서 순조롭게 이야기가 진행됐다. 그런데 김정태씨가 행장으로 선임되면서 불발탄이 돼버렸다. 그러던중 98년 9월초 금감위로부터 장기신용은행과 접촉해보라는 연락이 왔다. 장은의 오세종 행장과 만날 일정을 정했는데 장은이 갑자기 국민은행과 합병을 해버렸다. 합병을 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흥은행과의 합병을 선호하지 않았다. 시중은행에서 짝을 찾지 못하면서 본점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조건으로 금융당국이 탐탁찮게 생각했던 지방은행(충북+강원+현대종금)과 합병을 하게 됐다. -IMF사태를 불러온 원인 가운데 하나로 관치금융을 꼽는 시각도 적지 않은데,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어땠나. . ▦당시 기업구조조정이라는 원칙만 있었을 뿐 (금감원은) 개별 기업사정은 모른체 몰고 가는 분위기였다. 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맡겼으면 구조조정이 효율적으로 됐을 것이다. 대형화가 되서 지금 얻은 것이 무엇이냐. 금융시스템은 안정됐지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낮다. 은행들 모아 놓고 덩치만 키웠지 슬림한 조직을 만들어 경영효율성을 꾀하지는 못했다. 기업체 역시 당시에만 부채비율을 무조건 200%로 맞출 것을 독려했지 후속 정책이 전혀 없었다. 계속적으로 효율성을 꾀하는 체계를 만들었어야 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에도 합병 등에 대한 승인 절차만 까다로워졌지 어떤 수익모델을 갖고 대형화 해야 된다는 가이드 라인은 전혀 없는 상태다. 오로지 시장지배력만 키워 자금을 운용하면 된다는 사고만 팽배해지고 있다. -대형화만이 살길이라는 ‘패러다임’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은행 대형화의 처음 목적은 시스템 안정과 국제경쟁력 강화였다. 시스템은 단기적으로 안정됐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대형화 과정에서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환란이후 은행원에 대한 대우도 좋아지고 e뱅킹 등으로 편해졌지만 해외 선진금융과 비교하면 국제 경쟁력은 아직 멀었다. 국내 은행들이 시장 지배력을 높이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위험적으로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최근 급증한 주택담보대출도 그 예다. 우리나라 금융업은 해외 경제 여파와 국내 경기 환경에 너무 민감하다. 경기가 조금만 나빠져도 바로 연동되고 은행 한 곳만 잘못돼도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대형화를 통해 어떤 모델로 끌어갈지 경영진이 잘 생각하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감독기관의 기준이 명확히 확립돼야만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최근 부동산담보대출에 대한 은행권의 대출행태를 놓고 과거 위기론과 비교하는 지적도 많은데. ▦충당금을 쌓더라도 시장을 먼저 점유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 역시 경영진들이 경기민감도에 대한 자각을 못하고 자금운용을 하다 결국 자율적으로 문제를 풀기 보다는 관치금융으로 끝나지 않았나. 이번에 DTI 규제 같은 것은 말도 안 되는 사례다. 전체 수입의 40%만 대출해주도록 제한한 DTI는 개인의 상환능력을 획일적으로 그은 전근대적인 것이며 선진 금융기법과 거리가 멀다. 위험적인 자산운용에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감독기관이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산운용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서 해야지 창구 지도로 하면 관치금융은 사라질 수 없다. 금융당국이 점검하겠다고 회합 소집하고 난리를 치면 금융 회사들은 복종하는 타성에 젖어 있는데 이제는 스스로 위기관리에 대처해야 할 때다. ◇프로필 ▦39년 전남 장흥 ▦광주고ㆍ서울대 상학과 ▦64년 조흥은행 입행 ▦81년 싱가포르사무소장 ▦84년 영업3부장 ▦87년 샌프란시스코지점장 ▦91년 영업3부장 ▦92년 심사부장 ▦92년 이사 ▦94년 상무이사 ▦98년 전무이사 ▦98년 은행장 직대 ▦99~2002년 은행장 ▦2002년 이사회 회장 ▦한국 CFO협회 회장 ▦2005년 (주)이노츠 대표이사 회장 입력시간 : 2007/01/29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