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은행들의 대우사태에 따른 손실은 발표(31조원)된 것보다 클 것이다. 대규모 손실에도 불구, 정부지원으로 생존하겠지만 한국경제의 장래를 위해서는 (정부지원이)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10월 한국의 5개 은행 신용등급을 올린 것은 재무건전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정부의 유동성 지원 때문이었다.』 브라이언 오크 무디스 부사장의 말이다. 오크 부사장의 말은 은행산업의 현실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지난 97년 환란 이후 은행산업은 합병과 퇴출이라는 격변 속에 하드웨어 부분에서 대단한 변화를 경험했다. 은행은 그러나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정부의 이른바 「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이란 미명에 휘말려 또다시 생존을 위한 건전성(BIS) 문제에 봉착했다.
대우라는 국가의 환부를 치유하려 16조여원의 손실을 입은 데 이어 투신사 불안에서 파생된 금융시장 불안요소를 잠재우기 위해 채권시장 안정기금의 명목으로 30조원을 쏟아넣었다. 한투·대투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3조원을 출자해야 한다. 대우 환부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년에도 추가자금 투입이 불가피하고 경기회복으로 금리가 오르면(채권값 하락) 채안기금에 집어넣은 돈은 고스란히 평가손이 된다. 금융권간 부실의 부담이 옮겨가는 셈이다.
정부가 투신사 유동성 지원에 매달리는 사이 은행 신탁계정은 이탈 도미노에 고심하고 있다. 97년 말 200조원에 달했던 은행신탁은 올들어 최소 35조원 이상 빠져나가며 120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이젠 은행신탁의 유동성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번진 것이다. 「개발신탁」을 고리로 신탁부실을 치유하려 하지만 이는 주주가치 훼손이라는 또다른 부작용을 안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투신을 살리기 위해 신탁계정의 비상구 찾기를 미루고 있다.
미래상환능력기준(FLC)이라는 새로운 건전성 잣대가 도입되면서 수조원의 대손충당금 추가적립이 불가피해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멍(손실)날 곳밖에 없다. 올해도 은행은 8조~9조원의 적자를 감내해야 할 판이다. 3년 연속 적자다.
금융시장은 이제 『어떤 은행에 얼마만큼의 공적자금이 추가로 들어갈 것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는 형편이다. 은행산업의 비전은 관심 밖이다. 은행들은 주식예탁증서(DR) 발행에 실패한 대신 국내 유상증자로 이를 만회, 공적자금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애써 자위한다. 하지만 시장은 한두 개 은행에 공적자금이 추가로 투입될 것이라는 점을 당연시하고 있다.
은행은 그래도 「2000년은 클린뱅크의 원년」이 될 것이라며 한가닥 위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난망한 일이 되고 말았다. 성업공사에 부실채권을 매각, 몸체를 깨끗하게 하려던 계획조차 투신사 대우채권을 우선 매입하기로 함에 따라 불가능해졌다. 자체적으로 자산관리회사(AMC)를 설립, 부실채권을 매각하려 하지만 관련규정이 미흡해 녹록지 않다.
게다가 내년에도 대우에는 수조원대가 추가 지원될 예정이다. 기업구조조정 작업은 적어도 내년까지 이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내년 상반기까지는 부실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게 은행 스스로의 고백이다.
최공필(崔公弼) 금융연구원 박사는 『모든 구조조정 작업에 은행이 볼모로 잡히면서 내년까지 건전성 문제가 당면과제로 남게 됐다』며 『무엇보다 컨트롤 타워도 없이 은행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게 더욱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영기기자YG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