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명의 천형(天刑)일까. 치열한 경쟁은 스트레스를 부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밥맛을 잃게 만들고 수면을 단축시키며 죽음까지 야기한다. 피로에 지친 심신을 풀어주는 것 중 하나가 술. 뇌를 마비시킬 뿐 아니라 타인과의 스스럼없는 대화로 스트레스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윈스턴 처칠은 "술이 나에게서 빼앗아간 것 이상을 나는 술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시간과 건강 대신 친구와 위로를 얻었다는 의미이리라.
△약육강식의 정글법칙 중심에 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에겐 술이 곧 휴식이다. "경영을 할 때 한잔의 와인과 같은 여유가 필요하다"는 한 경영인의 고백처럼 긴장의 끈을 이완시키는 유일한 도구인 셈. 지금은 절주(節酒)를 선언했지만 과거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폭탄주 20잔을 거뜬히 마셨던 것이나 버번위스키에 빠져 있던 허브 켈러허 사우스웨스트항공 회장이 술 공장에 화재가 났을 때 수백상자를 사재기했던 것도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도피처를 찾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비즈니스나 접대용이라고 꼭 비싼 술이 필요한 건 아니다. 1999년 소떼 방북을 이뤘던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은 김정일 당시 북한노동당 총비서가 '박정희 대통령이 마시던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이듬해 남북정상회담 때 배다리 막걸리를 만찬주로 제공했다. 서민의 술이 꽉 막혔던 남북 간 통로를 튼 셈.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나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비싼 양주나 와인 대신 소주를 즐기는 것도 '비즈니스용=고급술'이라는 편견을 깬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73번째 생일 만찬주로 1만원 안팎의 전통주가 올랐다고 한다. 과거 생일 때 수십만원대 고급 와인이 '이건희 와인'으로 선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마도 장기간 경기침체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서민과 괴리감을 줄이려는 나름의 고심이 반영됐을 터.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쁘진 않아 보인다. /송영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