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 경제협의체(APEC)가 회원국간 불화와 협력 부족으로 존립 위기에 몰리고 있다.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APEC 각료회담에서 미·일의 대립으로 9개 분야의 「자발적 조기 무역자유화」(EVSL)에 대한 합의가 끝내 실패, APEC 설립의 최대 목적인 무역자유화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게다가 10여개월째 계속되는 아시아의 경제위기 해소에 대한 APEC의 역할 부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고조되고 있지만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불참으로 경제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합의는 도출키 어렵게 됐다.
APEC은 당초 미, 일 등 21개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17일부터 EVSL 합의 아시아지역 금융위기 해소 방안 헤지 펀드 규제방안 마련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앞서 15일 열린 각료회의는 EVSL 협상과 관련, 임·수산물의 관세 철폐를 거부한 일본의 반발에 따라 이 사안을 세계무역기구(WTO)에 넘겨 99년말까지 타결키로 의견을 모으는데 그쳤다.
이 안건이 자발적인 수용을 전제로 하는 만큼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개발도상국의 주장과 일본은 같은 입장을 보였다.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아간 EVSL안이 정상회담에서 전격 채택될 가능성은 물론, WTO안에서 99년말 타결 목표에 맞춰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일본은 이날 타결 실패에 대해 자국의 승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라 정상회담에서 입장을 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또 WTO가 이 사안을 다루기 위해서는 APEC 회원국 뿐만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참여하는 범세계적 무역 협상으로 확대할 수 밖에 없어 99년말까지 타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없이 끝날 것으로 예측하기는 아직 이르다.
미·일은 아시아 위기해소 방안의 하나로 아시아 회원국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보증하는 기구의 설립에 대해서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지난 9월 일본은 「미와자와 플랜」에서 아시아국 채권발행에 대한 일 수출입은행의 보증을 약속한 상태다. 미국은 일본, 아시아개발은행(ADB), 세계은행이 참여할 규모를 봐가며 최종 입장을 밝히겠다는 자세다.
하지만 회원국중 최대경제국인 미국이 이라크사태를 이유로 빌 클린턴 대통령 대신, 엘 고어 부통령으로 참석자를 바꿈으로써 정상회담의 신뢰가 일단 떨어졌다. 또 개최국인 말레이시아가 내부 정쟁으로 국내외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있어 APEC 정상회담은 「말의 성찬」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