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진 후 최수현(사진) 금융감독원장은 확연하게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 연초부터 '법과 원칙'을 강조하던 최 원장은 지난 4월 주요 은행장들을 금감원으로 소집해 "금융사고를 낸 경영진에는 관용이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같은 발언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시험대는 현재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 상정된 KB 제재 건이다.
"과도한 제재 아니냐"는 반발이 나왔지만 금감원은 임영록 KB지주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에게 중징계를 통보하며 '솜방망이' 논란을 불식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각종 금융사고에 지칠 대로 지친 여론도 금감원의 편에 섰다.
하지만 오는 24일 제재 결정을 앞두고 금감원이 곤혹스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중징계를 벗어나기 위한 금융권의 로비전과 KB 제재의 법적 근거가 잘못됐다는 감사원의 돌발 개입으로 제재의 동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제재심의위를 구성하는 일부 민간 위원들 사이에서도 "법리적으로 중징계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기류가 일부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원은 조만간 KB 제재 근거 중 하나인 신용정보법 문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공식화할 방침이다. 앞서 금융당국은 KB가 국민카드 분사 과정에서 신용정보법상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했지만 감사원은 금융지주회사법의 특례상 이를 문제 삼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다.
감사원 입장이 확정될 경우 금감원 심의 위원들은 KB 경영진에 대한 중징계를 내리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금감원 내에서는 KB 경영진에 대한 제재가 만약 경징계 수준으로 감경될 경우 금감원에 불어닥칠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감원의 한 간부는 "무엇보다 금융권에 영(令)이 설 수 없게 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단순히 체면을 구기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태산명동서일필, 즉 태산을 울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는데 나온 게 고작 쥐 한 마리밖에 없는 격이다. 가뜩이나 외풍에 취약한 금감원은 중징계를 관철하지 못하면 정치권과 정부로부터도 거센 압박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당장 정기국회와 국정감사를 비롯해 10월까지 국회 정국이 펼쳐진다. 가뜩이나 금융위는 금감원의 검사 및 제재권을 일부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금감원으로서는 이래저래 징계 수위를 낮추기 힘든 '외통수'에 몰리는 모습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적 문제를 떠나 분사된 국민카드에 카드회원도 아닌 국민은행 고객 정보가 넘어갔다"며 "이는 확실한 징계 사유"라고 강조했다. 은행 전산시스템 교체 과정에서의 내분도 여전히 징계 사유로 남아 있다. 물론 제재심의위원들이 여러 압박을 의식해 절충된 제재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임 회장과 이 행장 중 한 명에게만 중징계를 내리며 솜방망이 논란을 희석시키는 방식이다.
이런 기류를 의식한 듯 금감원 제재심은 17일에도 KB 경영진에 대한 제재 심의를 저녁 늦게까지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