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1일] 독일관세동맹


서울에서 부산으로 물건을 팔러 가는데 길목마다 세금을 거둔다면 장사가 될까. 개인이고 나라고 망하기 십상이다. 19세기 초 독일이 딱 이랬다. 느슨한 연방으로 묶인 35개 제후국과 4개 자유도시가 제각기 통행료와 관세를 거뒀다. 심지어 같은 제후국 안에서도 지역별로 관세를 매겼다. ‘독일을 사랑했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한탄을 들어보자.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물건을 내가려면 10가지 관세 규정을 연구하고 세금과 통행세를 10차례나 물어야 한다. 팔다리가 꽁꽁 묶였는데 어떻게 피가 돌 수 있는가.’ 관세 문제를 푼 주축은 프로이센. 1818년 프로이센은 역내관세부터 없앴다. 주변국들도 그 뒤를 따른 결과는 놀라웠다. 관세 부담이 없어지자 물건 값이 싸지고 소비가 늘며 유통이 살아나 생산을 촉진시켰다. 1834년 1월1일, 18개 영방이 모여 관세동맹을 맺은 것도 무관세와 시장 메카니즘의 위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관세동맹은 독일경제 전체를 폭발적으로 키워냈다. 1835년에 처음 깔린 철도의 총연장이 1850년 5,800㎞, 1860년 11,600㎞로 늘어난 것도 관세철폐로 인한 내수활성화 덕분이다. 독일자본주의의 싹이 튼 것도 이 때다. 급성장하는 경제에 고무된 관세동맹 가입국들은 교통시스템과 통화제도와 어음ㆍ도량형까지 순차적으로 통일시켰다. 경제통합은 1871년 강력한 통일국가인 독일제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비스마르크의 철혈(鐵血)정책에 앞선 경제통합이 오늘날 독일의 반석을 깐 셈이다. 경제통합이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구조는 역사에 묻힌 얘기가 아니다. 유럽연합도 유럽철강공동체가 발전한 결과물이다. 관세동맹이 추구했던 통합과 상생은 173년이 흐른 요즘에도 여전히 시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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