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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을 초월한 교감…리움 10주년 기념전
삼성미술관 리움의 1관 2층 고서화실에는 조선시대 왕의 행차를 그린 18세기 ‘환어행렬도’라는 그림이 있다. 왕을 보기 위해 노상에 나온 사람들이 화폭 가득 빽빽한데 각 인물이 개성있는 표정과 고유한 몸짓을 보여준다. 지위가 높으면 더 크게 그렸던 옛 그림과 달리 모두가 같은 크기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맞은 편에 현대미술가 서도호의 세로 194㎝ 가로 130㎝의 신작 ‘우리나라’가 설치됐다. 키 1.5㎝ 정도의 사람 수십 만 명이 400년 전의 그림처럼 한반도를 가득 채우고 서 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남녀노소가 섞여있다. 작은 섬 독도는 아기 업은 엄마가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지키고 섰다.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인물상을 두고 전시기획자인 우혜수 리움 학예실장은 “김밥 한 줄 굵기의 공간에 8,000명 정도가 들어가 있다”고 귀띔한다. 고서화와 현대미술의 교감을 표현한 이 작품은 집단 속에 함몰된 개인의 정체성이 흐려진 듯 해도 예술과 역사를 이뤄낸 것은 ‘사람’이었음을 새삼 일깨운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교감’을 주제로 한 기념전을 12월21일까지 개최한다. 개관이래 처음인 전관(全館) 전시를 위해 2년간 준비했고 3주간 휴관한 채 준비한 결과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미술 감상의 ‘종합선물세트’를 보여주고 있다.
고미술 상설 전시실인 1관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함께 선보인 ‘시대교감’으로 국보급 청자들이 가득한 4층 청자실에는 흙에 대한 성찰을 담은 김수자의 영상작품 ‘대지의 공기’와 청자 유약의 비색을 연구한 바이런 김의 푸른색 색면 추상화가 함께 걸렸다. 3층 백자실의 국보 309호 달항아리 옆에는 도자사의 명맥이 끊긴 북한 회령의 흑자 파편을 재조합 해 만든 이수경의 ‘달의 이면’이 나란히 놓였다. 흑백의 조화, 역사의 안팎을 두루 생각하게 한다. 불상과 불화가 전시된 1층에는 명상적인 로스코의 추상화와 함께 참선하는 듯한 자코메티의 조각이 자리를 잡았다. 높이 20m의 로툰다(원형홀)인 건물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는 시장에서 사 온 플라스틱 그릇을 도금처리해 반짝이는 샹들리에처럼 꾸민 최정화의 작품이 길게 걸려있다. 제목은 ‘연금술’이다.
현대미술 상설 전시실인 2관은 ‘동서교감’을 주제로 근현대 한국미술부터 세계적 작가들의 수작을 두루 전시했다. 수백억원을 호가할 작품값은 차치하고, 요점정리 잘 된 현대미술사 책 한 권을 보는 듯한 가치를 지닌 전시다. 앤디 워홀, 요셉 보이스, 마크 로스코, 데미안 허스트, 쩡판즈 등의 대표작을 볼 수 있으며 이우환, 이불 등 국제활동이 왕성한 한국 작가의 신작을 볼 수 있다. 내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된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리움 소장품인 ‘금은장 쌍록문 장식조개’를 소재로 소지섭 주연의 신작 ‘qo’을 내놓았다. 유물을 둘러싼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의 역할과 가능성을 모색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전시실 계단을 관통하는 설치작품 ‘중력의 계단’. 샛노란 공간에 떠 있는 둥근 띠 모양의 구조물과 사방의 거울이 우주적 상상력부터 자신에 대한 성찰까지 자극한다. 빛·바람·안개 등 자연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탁월한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으로 태양계의 행성을 크기와 거리에 비례해 제작한 것으로 역사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아이웨이웨이, 에르네스토 네토, 리크릿 티라바닛 등 주요 작가의 대형 설치작품 등 볼거리와 관객 참여형 작품과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정제되고 고운 작품들이 주를 이뤄 현대미술의 실험성이 다소 배제된 것은 아쉬운 점이나 꼬박 하루를 할애해 제대로 감상할 만한 귀한 전시임은 분명하다. (02)2014-6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