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8> 재판은 장날에 파는 상품이다

소액법정 찾는 어려운 서민들 "판결 실수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

출근길 내내 오늘 선고할 사건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이든 할머니가 길을 가다 넘어져서 후유장해를 입고 보험금을 청구한 사건이다. 보험금 지급 사유는 명백해 보이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소멸시효 기간인 사고일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법정에 출석한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글썽이며 보험금을 받아야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다면서 꼭 보험금을 받게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을 만한 사유는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해야만 하는가. 노부부에게 어떻게 판결 이유를 설명해야 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출근길부터 머리가 무거워진다. 재판은 끝났다.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재판이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퇴근길에도 오늘 재판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패소 판결이 선고되는 것을 듣고 쓸쓸히 법정을 나서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빌린 돈을 모두 변제했는데 왜 재판장님은 한 쪽 편을 들어 자꾸 조정에 응하라고 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하던 피고 아주머니를 생각할 때에는, 비록 피고 당사자를 위한 의도에서였지만 재판 진행을 공정하게 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한다. 이혼을 한 후 파출부, 식당일 등 가리지 않고 고된 일을 하며 어린 세 자녀를 힘들게 키우던 피고 아주머니가 이혼 전 남편이 사용했던 카드대금 청구를 받고 억울함을 호소하던 사연, 암에 걸린 아내의 병원 치료비로 전 재산을 소비하고 생활비가 부족해 사용했던 카드대금이 몇 년이 흘러 원금의 몇 배에 이르게 되었다면서 이를 감액해 달라고 애원하던 피고 아저씨의 사연도 생각난다. 칠십이 다 된 할아버지는 홀로 살면서 월 오십만원을 벌어 그 절반이 넘는 돈을 집 나간 아들이 사용했던 카드대금을 갚고 나머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차가운 방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현실의 생활이 고단해서일까, 집 나간 자식이 그리워서일까.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낸다. 소액 법정은 눈물과 한이 많은 곳이다.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가슴에 상처를 안고 재판을 받으러 온다. 그들이 혹 나의 작은 실수로 또 다시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돌아가지는 않았을까 부질없는 걱정을 해 본다. 판사들은 재판이 있는 날을 ‘장날’이라고 표현한다. 재판기일이 매주 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생각된다. 재판에서 판사는 상인과도 같다. 원고와 피고 등 소송당사자는 재판이라는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법원을 찾는다. 판사가 품질이 좋은 재판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면 소비자인 당사자는 법원 재판에 신뢰를 보낼 것이고 법원의 판결에도 쉽게 승복할 것이다. 그 반대로 법원이 제공한 재판이 형편없다고 생각한다면 판사가 아무리 명 판결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에서 소비자는 자신이 산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상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재판에 있어서 당사자는 선택권이 없다. 자신이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법원을 원망할 뿐이다. 신뢰 받는 재판은 당사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재판을 주재하는 판사의 입장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생각하며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 보면 의외로 복잡한 사건도 쉽게 해결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또한 그렇게 했을 때 당사자는 재판을 신뢰하게 되고 설사 본인이 생각하는 결론과 다른 결론이 났다고 하더라도 판결에 승복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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