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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시간에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교무실 문을 열었다. 학생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노트북. 곧장 담임인 국어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담임선생님도 수업 시간에 찾아온 학생의 인기척에 그다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학생이 선생님께 노트북을 내밀며 말했다. “쌤, 어제 말씀해주신 대로 자기소개서 수정해왔어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교실. 영어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오늘은 자습 시간 줄 테니까 마무리하고. 지난 시간 진도나간 프린트물에서 질문 있으면 앞으로 나오고. 교실 밖으로는 벗어나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부 학생들은 질문을 하기 위해 교탁 앞에 일렬로 줄을 서고, 일부는 교실 뒤편 사물함으로 가 서서 자습을 했다. 한쪽에선 엎드리는 자는 학생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자라고는 안 했다!”
#대입 수시 자기소개서 마감을 끝내고 달력을 보니 대학수학능력평가까지 5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EBS 교재로 수능 영어 대비 수업을 해 온 A 교사는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 지 고민에 쌓였다. 수능 마무리용 교재로 진도를 나가기에는 출제될 확률이 적어 학생들이 공부하기 부담스러워 하고, 마냥 자습을 주자니 교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습 위주로 수업을 진행 중이긴 하지만 체력이 달려 피곤함에 조는 학생, 혹은 몰래몰래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등 제각각이다. 어쩔 수 없이 주 3교시 수업 중 1시간은 복습 위주로, 나머지 2시간은 질의응답과 자습 중심으로 수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진행해도 흐름이 깨진 학생들의 심란함이 느껴져 안타깝기만 하다.
◇‘수시에 올인’… 고사장으로 변한 교실 = 요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 어수선하다. 매번 대학 입시철마다 겪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다는 평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수시가 대학 입학에 결정적인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올해 대학들은 수시 전형을 통해 신입생의 60%를 뽑는다. 수시에서 떨어지면 대입의 바늘구멍이 더 좁아진다는 의미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수시가 1, 2차로 나뉘었지만 이번에는 한 번으로 통합됐다. 원서를 접수할 수 있는 곳은 무려 6곳에 달한다. 고3 학생들로서는 수업보다 전형 준비에 ‘올인’할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3 교실이 정상적일 수 없다.
실제로 이달 중순까지 대학 수시 전형을 위해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전쟁을 치른 고3 학생들은 이제 수시와 수능 시험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교사들 역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수업을 진행하느라 힘들긴 마찬가지. 특히 대부분의 대학이 수시 모집을 하면서 내신 성적을 3학년 1학기까지로 한정하다 보니 2학기에는 제대로 된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다. 일부 대학들이 면접 또는 실기 시험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출결 관리를 제대로 하기도 힘들다.
◇선생님은 학생 대신 사물함 보며 수업하고…= 어지러운 수업 분위기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다.
한 대형 수험생 전용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고3 교실 분위기에 대한 글이 최근 부쩍 늘었다. 카페 이용자 ckaw***는 “웬만한 친구들이 다 수시로 가서 그런지 수업도 자습이고… 1학기 때 이미 진도도 다 나갔겠다, 이쯤 되면 다른 학교 상황도 비슷하겠지?”라고 말했다. susi*** 역시 “솔직히 요즘 수업 아무도 안 듣지. 나도 1학기 때는 내신 때문에 수업 열심히 들었는데 2학기 되니까 안 듣게 된다. 선생님들 교실 뒤쪽 사물함 보면서 수업하셔서 마음 아프긴 한데 그래도 자습시간은 모자르다”고 고3 교실의 실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의견도 상당수다. ‘dmsg’는 “자습 시간 달라고 하도 떼를 써서 선생님께서 시간 주시면 제발 조용히 좀 하자. 안 그래도 어수선한데 다른 애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솔직히 수업 받고 싶은 애들도 있는데 자습 달라고 징징대는 애들 너무 많다”고 불만을 표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근무 중인 한 교사는 “고등학교 3학년의 경우 대부분 1학기 혹은 여름방학까지 수능 범위 진도는 다 나간다. 수능을 50여일 앞둔 상황에서는 앞서 배운 내용을 복습으로 수업을 하거나 자습을 주거나 하는 등은 개개 교사들의 재량”이라며 2학기 수업은 교사 재량에 따라 자습을 주거나 수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문제는 수시 접수가 시작되면서 자소서 준비 등으로 흐려진 면학분위기로 많은 학생들이 동요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학생들이 수시 지원을 많이 해 이를 지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