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사뮤엘 듀폰 느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 시계공으로 출발해 경제학자ㆍ궁정교사ㆍ외교관ㆍ망명객으로 변신하며 건국초기 미국역사를 장식한 인물이다.
1739년 파리에서 태어나 가업인 시계공 도제수업을 받던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정규수업을 받지 못했지만 중농주의 경제학의 창시자 케네에게 경제학을 익힌 그는 23세에 발표한 논문 두 편으로 일약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자유무역과 저율관세를 주장한 그의 논지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 왕실의 가정교사를 거쳐 귀국한 후에는 재정총감 튀고르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왕실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는 직언을 아끼지 않아 공직에서 쫓겨났다.
인생 후반부가 바뀔 계기를 맞은 것은 1782년.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금에 고민하던 루이 16세로부터 미ㆍ영간 평화조약을 중재하라는 밀지를 받고 나서다. 1783년 파리평화조약과 1786년에는 영불 무역협정까지 맺은 공로로 귀족 작위를 얻었지만 무엇보다 큰 소득은 토마스 제퍼슨 등과의 교류. 정쟁에 걸려 세 번 투옥되고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한 그가 1799년 미국행을 택한 것도 미국내 지인들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다.
나폴레옹에 의해 원로원 의원에 임명돼 잠시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결국 미국을 택한 그는 새로운 조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줬다. 프랑스 보유 북미 식민지를 미국에 넘긴 ‘루이지애나 매입’의 아이디어를 내고 실무교섭까지 맡은 것. 신생 미국의 서부 진출도 이 덕분이다.
1817년 8월7일, 78세로 숨을 거둔 그는 체취는 아직까지 내려져 온다. 부동산투기에 실패한 후 둘째 아들 이레네 듀폰과 함께 세운 화약공장이 다국적 화학회사 듀폰 그룹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