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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상황땐 대처능력 떨어져
처칠·링컨·윌슨·오바마 등 깜짝 부상한 '비여과형 지도자'
탁월한 정치력으로 혁신 불러
국무총리 후보였던 안대희 전 대법관이 '전관 예우' 의혹에 휩싸이자 지명 엿새 만에 전격 후보직을 사퇴했다. 인사 쇄신과 국정 개혁을 진두지휘할 국무총리, 즉 '리더'의 부재로 국내 정치는 표류하게 됐다. 더군다나 지금은 6·4 지방선거를 바로 코앞에 둔 상황이라 '리더'의 자질과 그 역할에 대해 재삼 숙고하게 만드는 때다.
마침 이번에 번역 출간된 '인디스펜서블(Indispensable)'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조직행동학부 교수인 저자는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가?'에 대한 학계의 오랜 논쟁에 대해 '딱 그 사람이, 딱 그 위치에서, 딱 맞는 시점에 등장해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역설한다. 지도자감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플라톤식의 기존 통념을 뒤집은 것이다.
그는 "진주만을 공격받은 상황에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조지 W.부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면 2003년에 이라크를 공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열고 자신이 창안한 '지도자 여과 이론(Leader Filtration Theory)'을 피력한다.
실제 인물의 사례로 그의 이론을 들여다 보자. GE의 CEO였던 잭 웰치는 포춘지에서 '20세기의 경영자'라 불릴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다면 잭 웰치가 아닌 다른 사람이 CEO였다면 같은 시기에 훌륭한 경영을 해낼 수 있었을까? 저자는 웰치의 전임자였던 레지널드 존스 역시 세 번이나 올해의 CEO로 선정됐고,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그를 '경영의 전설'이라고 칭송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GE처럼 철저한 조직이 세심한 평가와 선정 노하우를 통해 경영자로서 최고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한 덕분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즉 GE라는 조직이 뽑은 리더라면 웰치가 아닌 다른 CEO였더라도 충분히 좋은 경영자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같은 경우의 리더를 '여과형 지도자'로 명명했다. 여과형 지도자는 낮은 직책을 거쳐 권력을 잡기까지 철저한 평가를 거친 인물이다. 이들은 최고에 오르기까지 오랜 경력을 쌓았고, 그 과정에서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따라서 여과형 지도자는 능력을 검증받은 엘리트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은 독특한 장점이 없고 위기 상황에서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는 '아쉬운' 특징이 포착된다. 저자는 이 유형에 속하는 인물로 잭 웰치 외에 미국의 토머스 재퍼슨 전 대통령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전 수상을 꼽았다. 토머스 재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문의 골격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로 하원의원, 주지사, 국무장관 등 요직을 단계별로 거쳐 대통령에 올랐다. 재임 중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주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린 업적도 이뤘다. 그러나 저자의 이론에 따르면 당시 미국민의 눈높이나 공화당의 기준 등을 고려하면 존 애덤스, 제임스 매디슨, 에런 버 등 재퍼슨과 경쟁하던 유력한 후보자 중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여과형 지도자의 실패 사례는 체임벌린 전 수상이 잘 보여준다. 그 역시 엄청난 경력을 닦았고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수상직에 올랐지만 나치 독일과 맞서야 했을 때 그릇된 판단을 내려 영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여과형 지도자는 '매우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대응 능력이 취약하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비여과형 지도자 유형인 윈스턴 처칠은 정상적인 국가 상황이었더라면 수상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지만 히틀러라는 초유의 위기와 맞닥뜨리자 와일드카드로 급부상했다. 처칠은 경험과 재능이 탁월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과 호전성, 고집 등으로 수많은 실패와 적을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의회의 배척을 받았지만, 오히려 치명적 결점이 미덕으로 작용해 히틀러와 맞설 수 있었다. 이처럼 비여과형 지도자는 조직과 체계 밖에서 혜성같이 출연한다. 이를테면 선출된 지도자가 갑자기 사망하거나 조직이 정상적인 기능을 잃었거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등의 경우에 비여과형 지도자의 역량은 빛을 발한다. 조직이 이 리더의 능력을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고 그 행동방식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지도자를 선택한 경우가 많은 까닭에, 다른 지도자들이 전혀 시도 않던 일을 단행하거나 대부분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을 과감히 실행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의 독특하고 이례적 면모가 극적으로 체계와 국면을 바꾸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인물로 저자는 미국 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 애이브라함 링컨과 버락 오바바 대통령 등이 있다.
비여과형 지도자의 실패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의 경영인 앨버트 던랩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할 때 550명 중 537등인 열등생이었지만 회사 경영에서는 가차없는 비용 절감, 과감한 정리해고 등으로 기업의 단기 수익성을 극대화하며 기업의 해결사로 이미지를 굳혔다. 그의 저서 '던랩의 기업수술'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던랩은 축적한 재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회사를 경영하고 싶어했는데, 당시 고전하던 선빔이 던랩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그를 영입했다. 결국 던랩은 추악한 회계부정으로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선빔을 파산하게 만들어, 미국 역사상 가장 혹독한 비난을 받은 기업인 중 한 사람이 됐다.
여과형 지도자와 비여과형 지도자,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는 비여과형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그 실례로 경험이 일천했으나 인성과 수완을 발휘해 대통령에 당선된 비여과형 지도자 링컨이 있다. 그는 미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분열했음에도 노예제 폐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남다른 정치적 수완과 전쟁 지휘 능력을 발휘해 승리를 얻어냈다. 링컨은 자신감과 겸손함을 두루 갖춘 궁극의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책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의 지도자들을 분석했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현실이 겹쳐진다. 갑작스럽게 리더의 자리에 올랐으나 혁신보다는 머뭇거림이 더 많았던 대통령도 있었으며, 정치력은 검증되지 않은 지도자였으나 과감한 추진력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고 그 이면에 사회적 부작용을 동시에 야기한 대통령도 있었다. 오랜 정치 경험이 약이 되는 좋은 여과형 지도자일지, 그 자리에 누가 있더라도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을 그저 그런 지도자일지, 오히려 조직의 잘못된 선택이 파국을 불러 왔다는 후회를 낳게 할 지도자일지는 훗날 역사가 말해 줄 일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현재 조직의 검증과 평가 능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