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제2회 해외동포·주재원 수필공모 시상] 최우수상 김인숙씨

아이러브 폴 "어느새 나보다 더 큰 한국사랑에 가슴 뭉클"

1983년 1월3일은 남편이 호주의 퍼스(Perth) 지사로 발령받아 우리 가족이 고국을 떠난 날이다. 그때 딸애는 만 7살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아들애가 만 3년7개월이었다.(중략)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2월 딸애를 입학시키러 갔다. (중략) 딸애는 영어가 뭔지도 모르는 탓에 코흘리개 같은 1학년 애들 틈에 끼어 앉았다. 한국과 비교해 보니 입학연령이 이른 데다가 산수진도는 1년이나 늦었다. 공부수준으로 따지면 딸애는 2년이나 퇴보한 격이었다. 영어를 잘하게 되고 성적이 좋으면 내년에 3학년으로 월반시켜주기를 부탁했을 때, 쾌히 수락한 교장의 확약이 그나마 큰 위안이었다. 신난 건 아들 애였다. 사려 깊은 보조선생이, 누나가 하는 것처럼 그림에 색칠하고 색종이를 오리게 해줬으니까. 평범한 우리 애가 천재나 누릴 수 있는 조기교육을 받는 거라 흐뭇했다. 눈치 없이 ‘누나!’ 하고 부르고 누나자리로 가고 해도, 미소로 다 수용해주는 선생님들의 넉넉함이 고마웠다. 수업중임에도 몇 번이나 나가서 물먹고 화장실에 갔다오게 하는 열린 교육제도가 마음에 들었다.(중략) 한 달 정도 됐을까. 비가 오는 날이었다. 딸애를 데려오려고 나서는데 집 앞에 웬 낯선 차가 섰다. 머리가 길고 매력적인 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딸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비가 오는데 엄마를 기다린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면서, 같은 반 2학년인 폴(Paul)의 엄마란다. 딸애는 비록 1학년일 망정, 자연스레 정신연령이 비슷하고 제 또래인 2학년들과 어울렸나 보다. 완전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을 딸애에게 고맙게도 폴이 다가가서 제일 먼저 친구가 돼준 것이리라.(중략) 폴 엄마는 서양여자에 대한 내 선입관과 달리 소박하고 겸손하고 온유했다. 상대방을 보듬고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다. 이민족인 생면부지의 동양 여자 애와 그 가족에게 어떻게 아무런 편견과 거리감이 없이 먼저 호의를 베풀 수 있을까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중략) 나는 차도 없고 그곳 사정에 어두운 때라 애들을 기껏 학교, 도서관, 슈퍼만 쳇바퀴 돌 듯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폴 엄마가 딸애를 온갖 곳을 다 데리고 다녔다. 마치 친딸처럼. 딸애는 폴 네 집에서 수영도 하고 자고 오기도 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잡채, 빈대떡 같은 별식이나, 낚시로 잡은 생선을 깨끗이 손질해 갖다주곤 했다. 우리도 어디를 가게되면 가급적 폴도 데리고 가곤 했다. (중략) 하여간 1년 후 딸은 희망사항대로 3학년 폴 반으로 월반이 되면서 폴과 더 어울려 지내게 됐다. 그런데 허물없이 들락거리는 폴에게 꼭 하나 섭섭한 점이 있었다. 한국음식을 권하면 이상하게 낯을 가리듯 사양을 하는 거였다. 마침 폴이 집에 놀러왔을 때 아버지가 보내신 소포가 왔다. 나와 딸애가 좋아한다고, 배보다 배꼽이 큰 우표값을 감수하면서 그 먼 곳까지 햇곶감 한 상자를 부치신 거였다. 그 귀한 곶감을 폴한테도 줬더니, 처음 보는 거라 그런지 손에 들고는 난감한 표정이다. 하긴 보지도 먹어본 적도 없을 테니 그럴 법도 했다. 얼른 한영사전을 뒤져서 매우 맛있는 '드라이드 퍼시먼(dried persimmon)'이니까 먹어보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폴이 가고 난 다음에 우연히 쓰레기통을 보다가 천덕꾸러기가 돼버린 곶감을 보게됐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그리움에 가슴이 아린 터였다. 그런데 눈물나도록 소중한 그 곶감이 내팽개쳐졌다는 것이 너무 죄송하고 기막혀서 살짝 씻어 수정과를 만들었다. (중략) 음식문화와 역사의 차이는 친한 것과는 별개였다. 그 벽이 너무 높아서 극복이 어렵다는 게 안타깝지만, 강요한다고 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중략) 눈 깜짝 할 새 3년이 돼오는 어느 날, 날벼락처럼 지사가 철수하게 됐다. 아니 본사 자체가 공중분해 돼버렸다. (중략) 수주 받은 공사가 10년도 넘게 걸리는 거라 느긋하게 있다가 갑자기 귀국 짐을 싸자니 황당하고 허무했다. (중략) 그런 차에 뉴욕에서 사는 동생이 무조건 오라고 해서 무작정 기수를 뉴욕으로 돌리기로 했다. (중략) 뉴욕 땅에 내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낯선 우주에 떨어진 미아가 됐다. 안정됐던 지사원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밑바닥부터 개척해야 되는 험난한 이민 생활로 바뀌어졌으니까. 나도 처절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애들은 애들대로, 또다시 확 달라진 상황을 혼란스러워 했다. 표시나게 다른 영어발음, 어려워진 집안사정을 힘들어 했다. 학교수업을 끝내고 집에 와도 엄마가 없는 열쇠아동이 됐고, 방학 때면 4학년 짜리 딸애는 동생의 보모노릇까지 해야했다. 그 무렵 딸아이의 맺힌 말 한마디가, 미국서 산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을 콕콕 찔른다. “호주에서 그냥 살지. 왜 미국으로 와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돼? 호주로 다시 가서 살면 안돼? 응?”하고 울면서 항변하던 말이... 그렇게 한 치의 정신적, 물질적 여유도 없이 살았어도, 연말이면 폴과 작은 선물과 편지를 교환하면서 소중한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4년 전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딸아이가, 호주가 그립다며 폴 네 집을 방문했다. 폴 부모님이 우리 딸이 돌아 왔다면서 그렇게 반가워하고 끔찍하게 잘 해주었단다. 우리 가족사진과 내가 선물했던 매듭장식들이 여태껏 걸려있는 것까지 보여주었단다. 우리가 떠날 때 아기였던 폴 동생이 어느새 대학생이 돼서 아르바이트도 한단다. 딸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데 엄마! 어디서 일하는 줄 알어? 한국 식당이야!”, “차는 무슨 차인 줄 알어? 현대차야!” 한국 차를 샀다는 사실이 반갑고 좋으면서도 신기하고 좀 멋적은 표정이다. 저희들은 늘 일제 차를 사자고 하고, 나는 일장연설 끝에 죽어도 일본차는 안 된다고 해서 네 번 다 미국 차를 샀으니까. 그런데 폴 동생이 주저 없이 한국 차를 사고 아주 만족해한다는 사실에 뭔가 느껴지나 보다. 저희들 보다 낫다 싶은 모양이었다. 폴이 얼마 전에 뉴욕을 방문했다. 딸애랑 마중을 나갔는데 나를 보더니 눈이 다 젖으면서 꼭 안는다. 귀엽고 짓궂은 얼굴모양은 개구쟁이 때 그대로지만 인간미있어 보이는 청년으로 변모돼 있었다. (중략) 식당엘 데려갔더니 대뜸 김치찌개를 주문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어! 몹시 매울 텐데, 얘가 어떻게 먹으려고 시키지?’ 걱정스레 눈여겨보니까 찌개를 푹푹 떠서 밥 위에다 놓고 비벼가면서 먹는다. (중략) 화살같이 흐른 18년 동안 이렇게 음식까지 완전히 ‘한국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너무 신통하고 고마웠다. (중략) 자기네 가족은 ‘코리아’랑 관계되는 것이면 우리가 떠올라 무엇이던지 반갑고 관심이 가며 친근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자기도 현대차를 샀다며 으쓱댄다. 핸드폰도 보여 주는데 꼭 제나라 물건을 자랑하듯 한다. 우리가 한국에 대해 느끼는 자긍심과 애정보다 더 큰 자부심이 내비치는 걸 보면서 내심 뜨끔했다. (중략) 아직껏 일제만 기피했다 뿐이지, 정작 국산차는 산적이 없다. 결국은 내 모국사랑이 딱 고만큼 거기였다 싶어 자성이 됐다. 나야말로, 입으로만 애국하는 위선자가 아닌가. 폴이 내 차를 보고 이해 못하겠다고 흉이나 안 볼지 뜨끔하다. 부끄럽다. 폴이 떠나기 전날 만찬을 준비했다. 메뉴 선정에 꺼릴 게 없다보니 너무 좋다. 폴의 한국 사랑이 기특해서 한가지라도 더 먹이고 싶었다. 갈비찜에다 돼지갈비도 맵게 고추장 양념해서 굽고, 잡채, 전야에 나물들까지 순 한국식으로만 요리했다. 김밥을 버렸던 애였기에 혹시 미역국은 안 먹는 거나 아닌가 했더니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겼다. (중략) 분명 이민족인 폴이건만 음식교감이 되니까, 비로소 완전밀착된 느낌이 든다. 꼭 한국애 같은 생각이 든다. 이제는 한국음식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한국 식당에 가서 외국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한국의 국력과 경제시장이 커진 데다 모든 공산품들이 범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도약했다는 것도 느껴진다. 어느새 우리나라 제품들이 이렇게 환영받게 됐나 실감이 안 나고, 솔직히 거품이 될까봐 약간은 우려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어깨가 으쓱거려진다. 폴이 뉴욕에 와서 나와 애들에게 각성제 주사를 따끔하게 놓고 갔다. 나 같은 보통사람이 현실적으로 진정하게 애국하는 길은, 조그만 거래도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란 걸 새삼 깨우쳐 주고 갔다. 애들도 좀더 나이를 먹으면, 좀더 제 뿌리를 의식하게 되면, 사지 말라고 해도 국산 차를 사려고 하면 좋겠다. 아니 사게 될 것이다. 폴은 우리가족으로 인해서 ‘코리아’가 제 2의 고향이 됐다고 한다. 우리 가족도 역시 호주가 또 하나의 고향이다. 그리고 ‘아이 러브 폴(I love Pau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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