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글로벌리즘의 명암] 2. 달러통용론

공항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의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운전사에게 달러를 받을 것인지, 페소를 받을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아무돈이나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달러를 달라고 했다.미국 달러화는 현지 통화인 페소화와 함께 아르헨티나 어디에서나 통용된다.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이중 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셈이다. 은행의 현금인출기는 버튼만 누르면 달러화와 페소화를 선택해서 빼낼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은행 직원들은 돈을 찾으러 온 고객들에게 『달러냐, 페소냐』를 물어본 후 원하는 화폐를 지급한다. 서민들이 이용하는 일반 점포에도 5%가 달러로 통용되고, 외국인과 많이 거래하거나 부유층이 이용하는 상점에는 10%의 현찰이 달러로 거래된다. 호텔에서 100 페소를 미국돈 20 달러 짜리로 바꿔 달라고 하면 한푼도 수수료를 떼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준다. 은행 예금의 54%, 대출의 63%가 달러로 표시돼 있다. 미국 재무장관이 서명하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이 도안돼 있는 초록색 화폐(그린백)가 아르헨티나의 울굿불긋한 지폐보다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올초 인접 경쟁국인 브라질이 레알화를 평가절하하자, 아르헨티나에선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를 통용하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브라질이 흔들리자, 남미 대륙 전체를 불안하게 본 외국 투자자들이 아르헨티나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아예 이중통화제의 골격인 「달러 태환(兌換)) 정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완전한 「달러 통용제(DOLLARIZATION)」의 채택을 검토할 것을 내각에 지시했다. 달러통용제는 지난해말 멕시코에서도 논의됐고, 캐나다에서 일부 학자·은행가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학자들은 한술 더 떠 유럽 11개국의 단일통화(유로)에 경쟁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칠레까지 남북미 대륙을 달러 사용권으로 묶는 통화동맹조약을 체결할 것을 주장한다. 로버트 바로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미국의 동의없이 아르헨티나의 달러화는 불가능하다』며 『달러 권역의 국가에 미국이 구체적인 신용대출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하에 달러를 공용화폐처럼 쓰고 있다. 캐나다의 펄프, 베네수엘라의 원유는 달러로 결제되고 있다. 러시아·필리핀·볼리비아등에서도 달러는 비공식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달러를 자국통화로 쓰려는 이유는 외환 투기꾼들로부터 통화를 방어, 경제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달러에 자국 통화를 고정시켰던 멕시코와 브라질이 통화 방어에 실패, 극심한 경제불안을 겪었던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목적이다. 아르헨티나가 일단 달러화를 추진하게 되면 남미 국가들이 차례차례 달러리제이션의 물결에 휩쓸릴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는 역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남미 스페인어권의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겔 키겔 아르헨티나 경제부 재무담당 차관보는 『달러화 정책은 좋은 아이디어』라며 『아르헨티나가 이 정책을 받아들이면 인접국들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달러화 정책은 경제 안정을 도모할수 있지만, 자국 경제를 미국 경제에 종속시켜 경제 주권이 침식당하는 결정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의 통화및 금리정책에 달러 사용국들의 경제가 좌지우지될 위험성이 있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리(FRB) 의장도 이런 위험을 한마디로 무시했다. 그는 지난 4월 22일 의회 증언을 통해 『다른 나라들이 달러 사용을 채택하더라도, (미국의) 통화정책이 (이들 국가를 위해) 변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1페소=1달러」의 고정환율제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작품이다. 89년 취임한 메넴 대통령은 80년대의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내는 공장에 불과했고, 통화정책은 전무했다. 돈을 찍는 기계가 풀가동되는 바람에 한쪽면만 인쇄해 통용했을 정도였다. 메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인플레이션은 연간 5,000%에 이르렀다. 메넴 대통령의 경제개혁안은 도밍고 카발로 당시 재무장관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중앙은행의 화폐 인쇄를 중단시키고, 아무나 환율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달러 태환(兌換)정책을 헌법에 명시했다. 그리고 「통화위원회제도(CURRENCY BOARD)」라는 독특한 환율 운영체계를 시행함으로써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무력화시켰다. 이 제도는 중앙은행이 통화 방어를 위한 외환을 보유하지 않고, 고정환율을 금리 변동으로 유지하는 제도다. 95년 메넴 정부는 태환정책이 안정되기 전에 멕시코 페소화 절하에 따른 테킬라 효과가 남미에 불어닥쳐 또다시 극심한 경제 혼란에 시달렸다. 이때 카발로 장관의 일화는 국제금융가에 전설처럼 남아있다. 멕시코 사태 발생 열흘 후에 카발로는 월가를 찾았다. 그는 투자자들을 만나 어떻게 하면 아르헨티나가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는가를 묻고 그들의 조언을 구했다. 한달 후 뉴욕을 다시 찾아온 카발로 장관은 월가의 조언대로 경제 정책을 추진했음을 밝히고 아르헨티나에 투자할 것을 요청했다. 메넴 정부는 월가의 요구에 따라 정부지출 삭감, 세수 증대, 공기업의 매각등을 통해 재정 균형을 이룬다는 내용의 경제대책을 수립, 시행했다. 공무원의 봉급을 5~15% 삭감하고, 국영석유회사(YPF)의 주식을 매각했다.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95년 멕시코 위기와 97~98년의 아시아 위기의 파장을 비껴갈 수 있었다. 10년전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달러를 받아들이면 아르헨티나는 미국의 준자치령인 푸에토리코처럼 미국의 부속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한 적이 있다. 그는 파산 직전의 경제를 물려줌으로써 후배들이 자신의 우려한 대로 경제를 이끌게 한 원인 제공자임을 당시엔 몰랐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김인영 특파원 IN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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