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 국내 대기업들에게 「기업(사업)매각」이라는 말은 다소 생소한 단어였다.그동안 어느 기업할 것없이 모두 기업인수나 확장에만 매달렸지 기업매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돈이 필요할 때 은행에 손만 벌리면 되는데 굳이 기업을 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업매각에 있어선 한마디로 문외한이었고, 매각노하우는 아예 갖고 있지도 않았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국내굴지의 대기업인 S기업이 지난 상반기 주력사업의 하나를 매각하면서 얻은 교훈과 고충을 보고서형태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회람시킨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창업후 처음 추진한 사업매각이었고, 이로인해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매각노하우를 직원들이 숙지토록 하자는 게 그 취지였다.
그러나 이같은 경영환경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1년만에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지난해까진 무조건 사들이는게 최선으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버리지않으면 죽는 상황이 됐다. 기업매각이라는 말은 대기업들에게 가장 귀에 익은 단어가 됐다. 부채비율축소가 기업생존을 보장받는 절대절명의 조건이 되면서 기업마다 계열사나 사업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업매각을 추진하다보니 사업을 확장하는 기업이 오히려 주목받는 상황이 됐다.
IMF 관리체제는 익히 알다시피 50년 국내기업발전사에서 체질화된 기업들의 경영관행을 뿌리째 흔들었다. 특히 사상 초유의 구조조정과 개혁회오리에 휩싸이게 했다. 은행의 자금지원고리가 끊겼고, 부실기업은 강제퇴출되는 처지가 됐다. 그동안 관행으로 인정됐던 계열사간 내부거래도 부당거래로 판정돼 사상최대의 과징금을 부과당하기도 했다.
여기에 반도체·철도차량 등 대표적인 중복과잉종으로 선정된 7개업종에 대해서는 빅 딜(대규모 사업교환)이라는 구조조정작업이 추진돼 그룹간에 서로 사업을 통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나같이 국내 대기업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초유의 일들이다.
이같은 변화는 대기업의 돈줄이었던 금융환경자체가 바뀐데다 IMF 관리경제라는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대기업개혁을 다른 어떤 개혁과제 못지않게 중시,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비롯됐다. 사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동안 차입을 통한 성장전략을 기본경영전략으로 삼아왔고, 금융기관은 기업경영의 안전판역할을 했다. 설비투자는 곧 매출이며, 매출은 이익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로인해 차입경영이 관행화됐고 부실구조도 심화됐다. 또 차입을 통한 무차별적인 사업확장으로 한국식 선단경영체제가 고착됐으며, 계열사간 지급보증으로 견고한 결합체제가 구축됐다. 오너 또는 총수로 통하는 대주주의 기업지배구조도 심화돼 한국적 기업특징으로 자리잡았다.
IMF는 이같은 경영체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빚을 통해 얻은 번영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정부 역시 현존의 외채위기 극복과 미래의 산업효율혁신을 동시에 추구하기위해 기업들의 경영관행에 대해 날카로운 메스를 가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당선자시절부터 강력하게 밀어부친 개혁과제중 하나가 바로 대기업개혁이다.
金대통령은 지난 2월 당선자시절 30대그룹총수들을 초청해 대기업개혁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지배주주의 책임경영강화 핵심사업설정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해소 기업경영투명성 제고 등이다. 이후 정부는 금감위(금융권)와 공정위를 동원해 대기업들이 개혁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했고, 대기업들의 변화는 숨가쁘게 이루어졌다.
그룹마다 계열사 지배구조인 기획조정실을 해체하고, 총수들은 그룹회장에서 주력계열사 회장으로 직함을 바꿨다. 또 구조조정본부를 신설, 핵심사업위주로의 재편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매각에 나섰다. 부채비율축소가 기업들의 최대현안이 됐기 때문이다.
이와함께 국내기업사상 처음으로 사외이사제와 사외감사제도 도입돼 본격적인 경영감시체제가 갖춰졌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생존을 위한 기업 스스로의 변신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200%로 낮춰 차입경영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기업마다 알짜배기 핵심사업도 내다 팔아야 할 형편이다. 환란위기가 다시 닥쳐 경영환경이 더 악화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재계관계자는 『IMF사태로 차입과 매출위주로 운영해 온 국내기업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만큼 앞으로 이같은 경영체제에 지속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경영의 틀은 물론 기업판도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용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