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의원들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킨 다음날인 10일 알맹이 없는 청문회와 이전투구식 실랑이로 시민들을 짜증나게 했다. 이날 국회 법사위의 불법대선자금 청문회는 파행을 겪은 끝에 오후 2시30분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시작됐다.오전에 예정된 금융감독원 기관보고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점거소동으로 아예 열리지 조차 못했다. 청문회장에선 증인석이 텅 빈 가운데 의원들의 맞고함만 난무했다. 국정현안을 미루고 바로 싸움을 시작한 꼴이다.
국세청 기관보고도 시작되자 마자 추가 증인 채택문제를 놓고 말싸움을 벌이다 결국 우리당 이종걸 최용규 의원이 퇴장하고 나서야 진행이 이뤄졌다. 의원들은 주로 썬앤문그룹 김성래 전 부회장에게 질의를 집중시키며, 노무현 대통령이 감세 청탁에 개입했는지를 추궁했지만 재탕 삼탕 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청문회 막바지엔 `노`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국세청의 썬앤문 그룹 관련 서류 열람을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이용섭 국세청장은 "재판과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11일 대검 기관보고 때 열람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가 의원들의 호통에 결국 손을 들었다.
이에 앞서 우리당 의원 20여명은 이날 오전 금감원 청문회장에 김근태 원내대표를 필두로 들어와 법사위원들의 좌석을 점거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법사위원들은 "왜 남의 자리에 앉느냐"고 따지고 비켜줄 것을 요구했으나 우리당 의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당측 법사위원인 이종걸 최용규 의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신청한 증인만 채택된 반쪽 청문회다" 라며 청문회 중단을 요구했다.
서울대 법대 동기생인 함 의원과 우리당 신기남 의원 사이에 설전도 오갔다. 함 의원이 "물리적 저지가 정당하느냐. 법률가 맞어"라고 포문을 열자, 신 의원은 "법률가 이기 전에 정치인이다"고 받아쳤다. 함 의원은 이에 "정치인이기 전에 인간이 돼라"고 목청을 높였다.
청문회는 증인들의 무더기 불참으로 더 김이 빠졌다. 이날 채택된 증인 37명 중 불참자는 무려 21명.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사돈인 민경찬씨,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문인 이영로씨, 김정민 전 국민은행 지점장 등 핵심 증인들이 모두 출석을 거부했다.
법사위 소속 의원들의 무성의한 태도가 이런 사태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증인을 신청한 의원이나 당이 출석 요구서를 보낼 주소를 알려주는 것이 관례이나, 이번에는 100여 명의 명단만 넘겨준 뒤 `알아서 발송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진동 기자 jayd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