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데스크칼럼] '정책실패' 백서를 만들자

『아시아 금융위기는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해당국 정부들이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서 시장의 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폴총리)『금융위기를 겪고있는 아시아국가들은 개혁을 즉각 시행하지 않고 나중에 해도 된다고 믿는 이른바 「나중에」증후군에 걸려있다』(미셸 캉드쉬 IMF총재, 98년 2월 저개발 24개국회의 개막연설에서)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의 나락으로 떨어져 참담했던 지난해초, 우리는 칼로 도려내는듯한 해외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로부터 1년반이상 지난 요즘 우리 경제는 증시 활황과 내수 회복에 힘입어 외견상 회복의 흐름을 타면서 상당수 국민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다. 그런데 당시 외국인들의 충고를 다시 음미하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변했는지 짚어보면 서늘한 전율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옴을 느낀다. 정부와 기업, 금융기관은 빅딜, 재무구조개선 약정, 워크아웃이니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추진해온 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아직껏 매듭짓지 못해 옥신각신하고 있다. 금융 구조조정 분야에선 상당수 은행·종금·증권·보험사들이 문을 닫았지만 핵심사안인 제일·서울은행 매각과 대한생명 처리에선 1년이상 답보상태로 머물러 이미 수조원씩 국민세금을 녹여 없앴다. 천신만고 끝에 이끌어낸 노사정 합의는 한때의 추억거리로 변했고, 툭하면 노사(勞使) 양쪽이 탈퇴와 재참여의 헛된 발걸음만 되풀이하고 있다. 외환위기에 직접 책임이 있는 관료 집단들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대우그룹 회사채 환매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실무관계자들은 당국의 지도노선을 따르지 않는 시장참여자들에 대해 「매국노」「배신자」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강압하고 있다. 이런 구태의연 속에서 외국투자가들은 땅짚고 헤엄치기식 떼돈벌이 기회를 만끽하고 있다. 삼성자동차나 대우그룹 처리 과정 등에서 드러나듯 극소수 정책결정자들의 「밀실흥정」행정은 IMF사태 전에 비해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지난 1년반동안 우리 사회는 상당한 개혁의 성과를 이뤄냈음에도 각 부문의 개혁을 정리하는 막바지 고비길에서 정부·기업·금융기관 할 것없이 저마다 「개혁 피로」증후군을 노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수술받은 환자가 마취가 풀리자 새삼 고통을 호소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일단 최악의 바닥을 벗어나자 고통분담의 댓가를 요구하는 몸부림과 저항이 마구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8·15경축사를 통해 「재벌개혁」의 완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어 주목된다. 더욱이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김태동(金泰東) 정책기획위원장이 재벌의 1인지배 혁파와 관료·금융기관의 인적(人的) 청산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심상치 않은 메시지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며 가일층 분발을 촉구하는 지도자의 의지는 분명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이 오랜 고통분담과 「개혁 피로」에 지쳐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왜 우리가 외환위기의 굴레로 떨어졌는지 다시한번 냉정히 되새겨 보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난 연초 우리는 국회의 「외환위기 청문회」를 통해 한바탕 푸닥거리를 벌였다. 환란당시 정책결정권자이던 강경식(姜慶植) 전부총리와 김인호(金仁浩) 전경제수석을 「마녀」로 삼아 손가락질하며 모든 잘못을 떠넘겼다. 그렇지만 외환위기가 오기까지 가계·근로자·기업·정부등 각 경제주체들은 과연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 가에 대해 진지한 반성의 기회를 갖는 데는 실패했다. 임진왜란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대감은 쓰라린 경험을 겨울삼아 다시는 그런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취지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반면 정부는 6·25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를 맞기까지 쌓이고 쌓인 정책실패를 겸허히 반성하는 보고서도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삼성자동차·대우그룹 처리 과정에서 보듯 수조·수십조원의 혈세를 퍼붓게 만든 정책실패의 책임에 대해 그저 입을 닫고 있을 뿐이다. 공적자금 투입에 상응해 실패한 경영인, 금융기관 임직원들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책실패를 방조한 관료들에겐 면죄부를 주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그동안 발등에 닥친 현안 처리가 화급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개혁의 기본골격이 어느정도 잡힌 지금이야말로 환란을 부른 「정책실패」의 백서를 만들 때다. 환란에 이르도록 상황을 악화시킨 요인이 무엇인지, 외국인들의 숱한 비아냥을 감수토록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개혁의 고삐를 늦춰선 안되는 지도 명백히 밝혀질 것이다. 柳晳基(정경부장)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