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생각이 메마른 우리 교육

김인산 경북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해외학회 참석길에 공항서점에서 구입한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집 '노란집'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지금 왕성하게 교감을 하고 있다" '노란집'의 첫 번째 얘기, 노부부에게 찾아온 봄의 속삭임의 서두다. 작가들이란 참으로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책이다.

입시위주 일부 과목만 편식 심각

작가들은 어린아이에서 늙은이까지 가리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질투·분노·슬픔·허망함, 찰나의 쾌락, 비웃음, 진정한 행복, 삶의 고뇌와 깨달음, 죽음 등 그 모든 인간의 무상한 것들을 속속들이 들춰내는 얄미울 정도의 통찰과 그것을 그들만의 맛깔스러운 단어들을 섞어가며 엮어낸다. 그 마법의 솜씨는 대체로 필자와 같이 무뚝뚝한 심성의 자연과학자들에겐 부러움과 동시에 아예 무시의 대상이다.


소설은 주로 인간과 그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하며 과학논문은 자연 미지의 실상을 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단순화해 보면 둘은 서로 무척 대척점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둘 다 실험과 관찰 그리고 통찰력을 통해서 그 대상을 속속들이 파헤친다는 점에서 보면 비록 그 대상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가와 과학자는 다르기도 하지만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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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사회는 소설가가 되고픈 젊은이와 과학자가 되고픈 젊은이는 그 뿌리부터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념이다. 고등학교에서 문·이과 반이 분리돼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때는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 적이 있고 공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 과목만 선택해 입시를 치르도록 정부가 나섰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선 학교에 전달된 결과는 문·이과를 넘어서 문·이과 내에서도 선택한 몇 개 과목만 공부해도 되는 것으로 귀착됐다.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가. 교육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 세 가지에 목표를 둬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문·이과를 구분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 중심은 철학이어야 한다. 인간의 기본 교육은 생각하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기 즉 철학은 학문의 시작이요, 뿌리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가. 생각은 곧 인간의 존재를 의미한다. 느낄 줄 모르는 인간은 기계와 같다. 감성은 창의의 원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술과 몸짓을 익혀야 한다. 온몸의 감각으로 아름다움과 움직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타인과의 교감은 무리생활의 기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쓰고 말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학교에서 철학도 예술도 체육도 그리고 인문학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인문·과학 아우르는 환경 만들어야

우리의 교육은 분노로 가득 찬 로봇을 제조하고 있다. 분노하는 기계덩어리는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고 자신과 인류를 위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것들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 창조경제는 3년이 아닌 30년의 계획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장하석 교수의 '온도계의 철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상보적 과학은 역사와 철학 연구를 통해서 과학지식에 기여하는 학문으로, 현대의 전문가적 과학에서 배제된 과학적 물음을 던진다" 대부분의 과학전문가들이 가지지 않는 또 다른 과학적 물음이 철학과 역사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이런 물음을 던질 줄 아는 과학자가 육성되는 과학교육 문화가 형성돼야 그 토대 위에 그렇게 갈구하는 노벨상이 나올 것이며 그 노벨상 수상자의 행복한 산문집이 베스트셀러가 돼야 그 책을 읽고 자란 세대에서 또다시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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