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 의자들이 젖는다


의자들이 젖는다

- 윤제림


새마을 깃대 끝에 앉았던 까치가 일어난다

까치 의자가 젖는다

평상에 앉았던 할머니가 일어난다

할머니 의자가 젖는다

섬돌에 앉았던 강아지가 일어난다

강아지 의자가 젖는다


조금 전까지 장닭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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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철제 의자가 젖는다

포, 포, 포…… 먼지를 털면서 흙바람이 일어난다

의자들만 남아서 젖는다

봄비다.

까치를 받쳐주고 할머니를 받쳐주고 강아지를 받쳐주고 장닭을 받쳐주던 모든 것들이 남아서 젖는다. 고단한 생명들을 묵묵히 받쳐주던 더 고단한 것들이 젖는다. 피할 수 없이 젖으면서도 당신은 어서 지붕 밑으로 숨으라고 떠민다. '포, 포, 포……' 젖은 웃음 웃지만 이내 발밑까지 빗물이 차오를 것이다. 그러나 비가 그치면 젖은 곳만이 생명을 잉태할 것이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새싹은 찬란하지만 그 빛깔이 푸른 것은 생명의 깊은 목울대에 숨겨진 슬픔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의자들이 젖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있지만 누군가를 앉혀두고 있는 의자이다.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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