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9일 민주당 소속 의원 수십 명은 '6ㆍ10 범국민대회'가 열릴 예정인 서울광장을 선점하기 위해 경찰이 친 집회금지선(폴리스라인)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뚫고 들어가 텅 빈 광장에 스티로폼을 깔고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정부와 서울시는 폭력집회가 예상된다며 서울광장 사용 불허 방침을 내렸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악용해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무력화했다. 법을 만드는 의원들이 스스로 법을 어긴 꼴이 됐다. 경찰은 이 같은 불법적인 장면을 쳐다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2. 4월27일 오전 미국 연방 하원인 존 루이스 민주당 원내 수석부대표를 비롯한 의원 5명은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워싱턴DC의 수단대사관 앞에서 수단 정부의 인권탄압을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루이스 의원 등이 시위 도중 폴리스라인을 넘어 수단대사관 쪽으로 더 다가갔다. 그러자 경찰은 수차례 불법행위임을 각인시킨 뒤 해산명령을 내렸다. 의원들은 불응했고 순간 경찰관들은 주저 없이 루이스 의원의 손을 노끈형 플라스틱 수갑으로 채워 연행했다. 국회의원이 폴리스라인을 넘어 체포됐다는 소식은 국내에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당연한 일상일 뿐이다. 국회 의사당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망치로 문을 깨 부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불법집회에 참석해 되레 경찰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내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붕괴 직전의 사회규범들=집회 때 폴리스라인 무시는 기본이 된 지 오래고 무단횡단이나 신호등 무시하기, 사람이 다니는 인도에 올라와 질주하는 오토바이, 지정된 구역 외의 불법 현수막 설치 등등. 일상이 된 불법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처럼 사소한 무질서의 전염현상은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청소년들도 법질서에 무감각한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한 예로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이나 그림을 퍼가 자신의 홈피를 장식하고 영화파일을 게시판 자료에 올리는 것과 같은 불법행위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됐으며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 불법에 대한 무감각이 심각한 실정이다. 실제 대검찰청은 최근 지난 3~5월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음악ㆍ영화파일 등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된 19세 미만 청소년 1만620명 중 7,839명에 대해 조사 없이 사건을 종결하는 각하처분의 고육지책을 내리기도 했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을 전후해 불량 제수용품을 판매하는 사범이 늘어나는 것도 법질서 의식이 약해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질서 붕괴는 단속비용 등 매년 사회적 비용을 키우며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 되고 있다. ◇사교육 열풍도 룰을 지키지 않은 탓=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국내 사교육 문제는 도를 넘어섰다. 선행학습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은 긍정요인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다.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사교육 열풍도 기존의 규칙을 깨면서 촉발됐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대표변호사는 "선행학습도 기존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누군가 학원을 보내면서부터 이제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모두 선행학습을 해야 된다는 믿음에 빠져드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사교육비 상승은 가계의 부담으로 되돌아와 소비부진과 급격한 중산층 붕괴를 초래해 경기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사교육비 상승은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는 만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우 대표변호사는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고 공교육 일정대로 교육을 받아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을 가져야 하며 당국도 이 같은 확실한 믿음을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소한 법집행이라도 무관용 원칙을=경제가 어려울수록 법질서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있다. 법질서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그만큼 낮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 차문중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기업경제연구부장은 "1990~2006년 세계 주요 국가의 법질서 수준과 경제성장을 비교해보면 법질서 수준이 극히 낮은 국가가 같은 기간에 겪은 경제위기는 평균 2.3회에 달하지만 법질서 수준이 높은 국가는 평균 0.4회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누구든지 법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적용에 있어 온정주의를 버리고 아무리 사소한 부분의 불법이라도 무관용 원칙에 따라 명확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빨간 신호등인데도 한두 명이 건너가기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하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법집행이라도 온정주의를 버리고 무관용 원칙이라는 강력한 잣대를 적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법질서 강조 자체가 공안정국을 유도한다는 발상도 나오고 있지만 천성관 검찰총장 내정자는 "인권보장의 바탕이 되는 법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검찰이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하겠다"며 "공안(공공의 안녕)이 잘 보장돼야 인권도 잘 보장되는 만큼 똑같이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밝혔다. 시민들이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규제가 과도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면 어차피 지키지 못할 법이라는 자포자기 감정이 발생해 불법이 횡행해지기 때문에 전반적인 법규제 개선을 통해 모든 사람이 쉽게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드는 일은 정부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박철 법무부 법질서담당관은 "법을 잘 지키면 우리 모두가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며 "제도적으로도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아주 사소한 기초적인 룰도 지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의 법질서 관련 분야의 재정지출은 미비하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2009년 재정지출에서 공공질서 안정 부문의 재정은 전년보다 4.4% 늘었지만 이는 다른 분야의 증가폭에 비해 2.2%포인트나 낮은 수준"이라며 "정부도 법질서를 강조하지만 실제 예산집행에서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법질서를 지키지 않을 경우 당장 큰 불이익을 주는 게 단기적으로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어릴 때부터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된다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수년 전 모 방송국에서 정지선을 지키자며 캠페인을 벌였던 '이경규가 간다' 같은 프로그램이 여전히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 '일상화 된 법질서 위반' 어떤게 있나 오물 투기·무단횡단·불법 다운로드… 일상생활에서의 법질서 위반 사례는 널려 있다. 오물투기나 노상방뇨ㆍ음주소란 등을 비롯해 차선 끼어들기, 교차로 꼬리물기, 무단횡단, 새치기, 신호위반 등 수두룩하다. 노점상들은 거리 미관을 해치고 통행에 불편을 준다. 가게들이 도로에 가판대를 내놓고 장사를 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으며 시민들의 쓰레기 무단투기 등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쓰레기 무단투기는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정도가 심하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전봇대에 붙이는 광고들도 불법이다. 각 구청에서 정기적으로 전봇대 미관 청소를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각종 불법적인 광고물이 붙여지고 있다. 이에 따른 예산낭비도 심각한 실정이다. 전봇대는 국가 시설로 낙서나 훼손시 공용물훼손죄가 적용되며 광고물을 붙여도 범법행위에 해당된다. 불법 다운로드는 그 자체로 범죄다. 칼만 들지 않았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누군가의 지적재산권을 빼앗는 강도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불법 다운로드는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제46조 제1항에 해당하는 것으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으며 징역과 벌금을 병과할 수 있다. 그리고 교통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취약계층인 노인을 보호하기 위해 양로원ㆍ경로당ㆍ노인병원ㆍ복지시설 등 노인들의 왕래가 많은 도로에 설치하는 노인보호구역인 이른바 '실버존'에서는 시속 30㎞ 이하로 운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고 운행하는 운전자는 거의 없다. 어린이보호구역인 '스쿨존'에서 역시 시속 30㎞ 이하로 운행해야 한다. 이 같은 기초질서가 무너지면 선진 시민의식이 실종되고 사회ㆍ경제적 손실을 유발해 경제위기 극복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각인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석학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Trust)'라는 책에서 "신뢰가 형성돼야 거래비용과 분쟁이 줄어들어 저비용ㆍ고효율 경제가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고비용ㆍ저효율 사회를 고집할지, 아니면 저비용ㆍ고효율 사회로 발돋움해 국가경쟁력을 높여 모두가 잘 사는 국가를 만들지는 스스로의 법질서 준수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