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가 해외에서 인문학 박사 과정을 다녀본 사람은 한결같은 어려움을 고백한다.
당연히 읽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제시하는 고전들을 따라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이다. 루소의 ‘에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플라톤의 ‘국가’와 같은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고전들. 물론 이런 고전작품들은 국내에서도 필수도서목록으로 선정돼 권장된다.
문제는 고전에 대한 상투적 가치 인식만 있을 뿐 실상 고전 교육이나 학습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엄밀히 말해, 제목만 귀에 익을 뿐 서양 고전이든 동양 고전이든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 읽었다 해도 단편적인 몇 가지 것들일 뿐 지식의 체계로 흡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올 9월 새삼스럽게 거론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문제 역시 이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선언문을 일별해보면 최근 학계에 닥친 인문학의 위기감은 수치 만능주의로 획일화된 동시대의 분위기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학교의 운영이 경영과 동일시되고 학교와 동떨어져 있었던 다국적 기업의 상품이 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학교의 교문을 일종의 성문(城門)처럼 굳건히 닫아 걸고 지켜내고자 했던 과거 80년대와 고작 20년 상간의 일이다. 학교를 성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체계로 급진화했던 한때도 문제였지만 학교의 경계가 산업이나 상업의 논리와 뒤섞인 현재는 더 위험해 보인다. 이제 대학마저도 자본과 산업의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으로 변질된 것이다.
학문과 산업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인식이 무뎌진다는 것을 뜻한다. 근본적으로 인문학이란 수치로 환산된 세계에 대한 거부이며 가속화된 현대 문명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학문의 열정이나 진리의 추구와 같은 추상어는 국제 경쟁력과 경제적 가능성과 같은 용어로 대체된다. 매년 발표되는 세계 대학 순위나 취업률 현황은 더 이상 대학이 상아탑일 수 없음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학교의 발전이 외형적 성장과 수치로 확인될 수밖에 없다면 최근 대학의 변화 양상은 ‘발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증빙 가능한 숫자와 문자가 점령한 대학에서 인문학은 필요충분한 조건이 결락된 사상누각으로 배제되고 있다. 기업과 유사한 대학의 정책 속에서 사유는 교환가치가 없기에 거부된다. 구체적 수치나 이윤으로 학문의 가치가 검증되는 이상 사유를 근간으로 한 인문학은 도퇴될 수밖에 없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인문학은 자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닐 포스트먼은 앎을 세 가지 체계로 구분했다. 가장 기초적인 앎은 정보(Information)이고 정보에 대한 분석적 이해가 지식(Knowledge)이며 정보와 지식에 대한 주관적 적용이 바로 지혜(Wisdom)이다. 인문학은 한낱 정보를 지식의 체계로 끌어올리는 학문의 영역이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누락됐을 정보와 사실들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지식으로 체계화되고 지혜로 전유되는 셈이다.
현재 대학은 정보만 넘쳐날 뿐 지식이나 지혜가 고갈된 공간이 되고 말았다. 지식과 지혜를 위해 태어난 근대적 공간이 스스로 전도된 셈이다. 이제 대학생들은 입학식 다음날부터 도서관에서 당당하게 고시공부나 취직 대비를 할 수 있다. 대학 도서관이 취업 준비 독서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문제는 누구도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반성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거론되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소생을 위한 계고로 확산돼야만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유의 부재이다.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발전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근원적 사유이자 반성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