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원점이다. 26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 4월27일 제출한 사의를 반려하고 유임시켰다. 4월16일 터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 총리는 물러나고 대신 개혁의지와 도덕성을 겸비한 새로운 총리가 비틀거리는 대한민국호(號)의 조타수를 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열망과 기대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지난 두 달 동안 국론은 분열됐고 이념대립은 심해졌다. 정치권은 정쟁을 일삼으며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데만 골몰했고 청와대도 난국을 헤쳐나갈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국민들의 한숨과 탄식은 깊어만 갔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낙마를 지켜보면서 전관예우 폐해에 속상해했다.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인식 논란을 바라보면서 갈기갈기 찢긴 우리 사회의 보혁(保革) 갈등에 마음 아파했다. 잇따른 청와대의 부실 인사검증에 의아해했다. 정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고 후임 총리를 고르는 동안 국민들의 마음에는 큰 생채기가 났다.
박 대통령의 책임이고 청와대의 과실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태라는 국가재난을 겪은 후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져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 대개조에 나서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또 "국민 눈높이에 맞는 총리를 뽑아 국가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총리 유임 결정은 박 대통령의 약속이 허언(虛言)이고 식언(食言)이었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줬다. 청와대는 총리 후보자 두 명이 인사청문회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여론과 언론 검증에 걸려 중도 하차한 마당에 새로운 후보자가 또다시 낙마할 경우 안게 되는 국정운영 부담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더 큰 멍에를 떠안게 됐다. 국가개조를 강단 있게 추진하고 대통령의 실책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총리를 원했던 국민들은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국민을 대상으로 조삼모사(朝三暮四) 인선을 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박 대통령이 중시하는 국정운영 원칙의 하나가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신뢰 없이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는 법인데 청와대는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을 상대로 꼼수를 부렸다.
공자는 논어에서 "방을 출입할 때 문을 통해서 출입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왜 살아가는 데는 정도(正道)를 걸으려 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 던지는 죽비 같은 꾸지람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