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부 실태조사결과 발표를 분기점으로 비정규직 기간제한을 둘러싼 지루한 정치공방이 끝나는 듯하다. 여러 해석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법 개정의 핵심논거였던 '100만 해고대란설'은 근거 없는 정치적 과장이었음이 드러났고 2년 넘는 계속고용의 비중도 63%에 이르러 예상 밖의 고용유지 효과를 보였다.
이번 조사가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노동부의 행정통계라서 통계청 표본조사만큼의 신뢰성은 없겠지만 기업 현장의 법 적용실태를 알아보기에는 손색이 없다.
비정규직법 전철 밟아선 안돼
노동문제는 자칫하면 정치쟁점으로 비화되고 이념대립으로 치닫기 십상이지만 지난 2004년 이후 5년간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논쟁과 갈등은 좀 유별났다. 보수ㆍ진보, 여야와 노사의 논쟁이 자존심을 건 힘겨루기에 빠지는 바람에 중도ㆍ실용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노동 부문에서 정권 초기의 의욕과잉은 흔히 노동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책실패를 초래했다. 이렇게 봤을 때 2003년 개별 사업장 분규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나 지난 1년간의 비정규직법 소동은 같은 맥락에 있는 정책실패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정부는 시장을 더 이상 혼란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9월 정기국회에서 정부 여당이 또 다시 비정규직법 개정을 시도하겠다면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정부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일자리를 늘린다는 막연한 구호에 현혹되거나 노동시장을 금방 개혁할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당분간 주어진 법과 정책수단으로 노동시장 성과 개선을 위한 미시적 개혁에 정책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또한 정부가 노동시장 개혁에 나선다면 경제부처나 외부전문가에 의존하기보다는 노동부와 한국노동연구원의 축적된 노하우와 노사정위원회의 의제별 위원회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1년간 비정규직법 개정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정책의 난맥상은 주무부처인 노동부가 중심을 잃고 정치와 외부개입에 휘둘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새 리더십으로 이념을 배제한 실사구시의 미세한 노동시장 정책 프로그램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이는 노동부가 고용정책의 주무부서로 자기 자리를 잡아야 가능할 것이다.
이번 정기국회는 비정규직법이 아니라도 노동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돼 있다. 한국 노동정치를 뜨겁게 달굴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복수노조 허용문제가 '13년 유예' 끝에 결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노동조합들은 이것을 법리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업도 아직 준비가 안 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1987년 식 노사관계'로는 미래가 없고 무엇인가 노사관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경제도, 노동운동도 다 망한다는 인식으로 이 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풀겠다는 결단과 각오를 다져야 한다. 전임자ㆍ복수노조 문제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이를 단초 삼아 한국 노사관계의 틀을 다시 짜고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마스터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문제의 해법도 보인다.
구조개편 마스터플랜 마련을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정책기조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공론화를 주도해야 할 노사정위원회는 '침묵의 카르텔'에 갇혀 있다. 실속 없는 정치공방으로 허송세월했던 비정규직법 논쟁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정부가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공론화를 통해 개별 기업의 노사가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법률상으로는 내년 초부터 시행이지만 아무도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 철저한 불신사태를 정부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지금 정부는 새로운 개혁과제가 아니라 밀린 숙제를 하는 것이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