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 경기의 더딘 회복에도 불구하고 연일 가파른 원화 강세가 이어지면서 원화의 달라진 위상이 주목 받고 있다. 1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ㆍ달러 환율은 2원30전 떨어진 1,022원10전에 마감, 4거래일 만에 연저점을 다시 한 번 깼다. 원ㆍ엔 환율은 100엔당 900원대로 떨어졌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1차관이 "원ㆍ달러 환율의 쏠림 현상을 우려한다"는 구두개입을 내놓았지만 먹히지 않았다.
위기마다 가장 큰 폭으로 출렁이던 원화는 확실히 과거와 달라진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원화가 안전자산으로 평가 받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다소 성급한 전망도 나온다. 무엇보다 이는 일본 엔화의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리는 것과 확실히 대조적이다. 엔화의 경우 지난해 공격적인 아베노믹스로 급격한 약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그마저 둔화됐다. 더구나 엔저정책으로 기대됐던 수출증대 효과마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일본 경제의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다.
◇급부상하는 원화, 안전자산 첫발 뗐을 뿐=최근 외환시장을 살펴보면 원화가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LG경제연구원이 금융위기 발생 시점 이후 6개월간 환율 움직임을 비교한 결과 원화가치는 2008년 9월 미국 금융위기 발생 이후 달러화 대비 22.5% 하락했고 2010년 5월 유럽 재정위기 이후에는 유로화 대비 3.8% 하락했다. 위험자산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신흥국 금융불안 문제가 터지자 원화가치는 달러화 대비 1.3% 상승하면서 다른 신흥국과 방향을 달리했다. 안전자산에 한걸음 가까워진 셈이다.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 풍부한 보유외환 등도 원화 강세를 단단히 뒷받침했다.
그러나 원화가 안전자산으로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놓고는 여전히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다. 안전자산이란 부도 위험 없이 언제나 교환할 수 있는 통화를 뜻한다. 원화의 경우 아직 엔화처럼 달러화의 대체통화 역할을 못한다. 소규모 개방된 시장이라 대규모 자금의 공격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안전통화는 △낮은 금리 △금융 불안정기의 가치상승 △많은 대외순자산 △풍부한 거래량 등의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원화는 아직 못 미친다"며 "선진국발 금융위기라는 시험대를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원화의 위상 제고는 사상누각"이라고 지적했다.
엔화와 비교해봐도 그렇다. 엔화의 경우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예외 없이 강세를 보였다. 해외투자자금이 일본으로 대거 회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민간 부문의 대외자산이 중앙은행의 2.7배 규모로 위기에는 든든한 방어벽이 된다.
◇하반기 달러 강세 얼마나 버틸지가 첫 관문=원화의 위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당장 올 하반기가 시험대에 오른다. 바로 미국 양적완화의 완전한 종료다. 이르면 연말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작업이 끝날 것이라는 게 월가의 일반적 관측이다. 이듬해에는 미국 금리인상 가능성도 있다. 약세인 달러의 방향성이 강세로 돌아설 때 원화가 얼마나 버틸지부터 지켜봐야 한다. 원화 강세 속도가 늦춰지는 수준에 그칠지, 원화가 다른 신흥국 통화와 마찬가지로 속절없이 평가절하될지 갈림길에 놓인 시기가 이때다.
역사적으로 달러가 약세일 때 엔화는 상대적으로 강세였고 원화도 강세인 적이 많았다. 원화 강세에도 세계 경제가 호황기여서 수출은 호황이었다. 원화와 엔화는 '100엔=1,000원' 공식으로 동조화 현상을 보였다. 하지만 달러가 강세일 때는 달랐다. 미국이 금리를 높이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일 때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과 같이 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엔ㆍ달러 환율이 높아지고 원ㆍ달러 환율이 하락하는 디커플링 현상이 발생하면 우리 경제는 특히 더 위험해졌다. 최근의 급격한 환율하락을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일단 외환 등 금융 부문의 방어능력은 탄탄하게 갖춰진 편이다. 하지만 수출의존도가 높은 특성상 전세계 실물경기가 위축될 경우 한국 역시 신흥국 시장과 동조화 현상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취약 신흥국과 달리 보유외환이 충분하고 금융시장 체질도 개선된 상태라 금융불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며 "하지만 원화 강세로 1,000원선이 일시적이나마 깨지고 중국 등 신흥국에 대한 수출이 둔화될 경우 실물경기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