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한국의 전문변호사] <7편> 건설·부동산 (3) 한봉희 율촌 변호사

지재권 전문서 '부동산 귀재' 대변신<br>환란이후 부실채권 업무 맡아, 10여년만에 새분야 달인으로<br>론스타 스타타워 매각방식등,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목끌어


'변호사의 변신은 무죄?' 법무법인 율촌의 한봉희(사시 26회·51ㆍ사진) 변호사는 주위에서 모험심 강한 '카멜레온'으로 불린다. 변호사 초년병시절부터 쌓아온 지적재산권 분야 명성을 과감히 버리고, 97년부터 부동산금융 분야를 파기 시작했는데 역시 10여년 만에 이 분야 달인의 평가를 받을 정도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난 87년 아세아 합동법률사무소에서 첫 변호사 일을 시작한 그는, 당시 '알파 인터페론'을 둘러싼 스위스 제약회사 로슈와 제일제당간 특허분쟁, 항생제인 '세팔로스포린'에 대한 일라이릴리와 삼천리 제약간 특허분쟁 등 굵직한 일을 도맡아 했다. 종근당이 출시한 위궤양 치료제 '오메포라졸'에 대해 다국적 제약회사인 아스트라가 제기한 특허권 침해 소송에서는 종근당 측을 대리해 승소해 지재권 분야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재권 전문에서 부동산금융으로 변신=특허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97년 법무법인 율촌으로 자리를 옮기고부터 부동산분야로 전공을 바꿔 변신에 나선다. 최고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지만, 한 변호사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는 "당시 지재권 분야의 경우 외국 기업들이 주로 소송을 제기하고, 국내 기업들은 '피고'가 되기 때문에, 외국 소송을 대리하다 보면 국내 기업은 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며 "그래서 10여년간 쌓아온 지재권 분야의 노하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영역인 부동산 분야를 개척하게 됐다"고 말했다. ◇10여년만에 "부동산금융의 귀재" 평가=시기도 잘 맞아 떨어졌다.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로 기업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부실채권 해외매각 업무가 폭주한 것. 한 변호사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외국계 투자회사들의 의뢰를 받아 부실채권 매입 자문 업무를 전담했다. 당시 부실채권은 대부분 부동산을 담보로 한 것들이어서 한 변호사는 자연히 부동산 금융분야 전문가로 승승장구 했고, 2000년 들어서는 외국계 투자회사들의 국내 오피스 빌딩 매입에도 참여했다. 그는 부실채권 매입을 위한 실사를 진행할 때는 호텔에 소위 워룸(War Room)을 차려놓고 한 달에 400시간씩 일할 정도로 일에 빠져 들었다. 한치의 실수라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게 한 변호사의 회고다. ◇론스타 스타타워 매각 "먹튀로 보기 어렵다"='먹튀'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론스타 벨기에 법인의 강남 파이낸스 센터(스타타워) 매각건도 한 변호사가 관여했다. 빌딩 자체를 매각하지 않고 빌딩을 소유한 회사의 지분을 넘기는 방식으로 매각 차익에 대한 과세를 피하는 묘안을 짜냈다. 주식 거래 차익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는다는 한국ㆍ벨기에간 조세조약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여론은 '먹튀'라며 마구 비난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 고생도 했다. 한 변호사는 "론스타가 탈법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지만, 매입자인 싱가포르 투자청은 언젠가 이 건물을 되팔 때 세금을 내야 한다"며 "세금 납부 시기만 문제일 뿐 '먹튀'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2007년 모건스탠리가 대우센터(현 서울 스퀘어) 매입하면서 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CR-REIT)를 이용한 것도 한 변호사의 작품이다. 리츠회사를 통해 부동산을 사들이면 취·등록세를 50% 감면해준다는 규정에 주목해, 최적의 절세법을 모건스탠리에 제시해 '오케이'사인을 받아낸 것이다. 지재권 분야 전문가에서 10여년만에 다시 부동산금융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변신에 성공한 그에게 외국 고객들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의례적 관문인 사시 3차에서만 2번 낙방 아픔도=1981년 겨울, 오래 전부터 판사의 꿈을 키우던 한 변호사는 사법시험 최종 관문인 3차 면접에서만 2번 떨어졌다. 사실 3차 면접은 일종의 통과의례여서 떨어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그는 2번이나 비운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인 79년 '유신헌법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교내 시위에 가담한 적이 있다. 시위주동자도 아닌 단순 참가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당시 사법시험 주관부처인 총무처가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며 불합격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 이후 24회 사법시험에서도 그는 3차 면접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고, 재도전에 나서 결국 26회 시험에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난관은 이어졌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후 진로 고민을 하던 그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판사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변호사였다. 법원 시보 시절 모시던 당시 김성기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에게 진로상담을 청했더니 "검은색이 회색은 될지언정 흰색이 될 수는 없다.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전력으로 볼 때 공직자로는 출세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변호사를 권했기 때문이다. ◇"10년에 한번씩 전공분야 바꿔라"=한 변호사는 "10년에 한번씩 전공 분야를 바꿀 각오를 하라"고 종종 후배들에게 충고한다. 아무리 돈이 되는 '블루오션' 분야라고 해도 10년 후에는 '레드오션'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 부실채권 정리, 부동산금융 등 상황에 따라 전공을 바꿔온 한 변호사는 요즘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중국어ㆍ스페인어 등 외국어 공부에 열심이다. 그는 "앞으로 10년간 변호사로서 활동을 한 뒤, 60세가 되면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시대를 앞서 읽고 변신해 온 '카멜레온' 한 변호사의 다음 모습은 무엇이 될 지 궁금하다. He is… ▲1958년 충남 당진 출생 ▲1977년 서울 한성고 졸업 ▲1981년 서울대 법과대 졸업 ▲1983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 석사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 합격 ▲1987년 아세아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1988년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수료 ▲1992년 미국 윗트만앤램섬 변호사 ▲1997년 (현)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2004년 서울대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