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의 패배가 발표된 5일 오전8시23분(현지시각 4일 오후5시23분), 맑았던 과테말라의 하늘에서 돌연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승수 평창 유치위원장도, 우리 유치단을 지켜보던 과테말라 국민들도 눈물을 훔쳤다. 평창의 꿈은 이렇게 막강한 러시아의 힘과 유럽의 지역주의에 힘없이 무너졌다.
◇유럽의 지역주의와 푸틴의 힘, 오일달러에 패배=최종 발표 뒤 공개된 득표를 보면 1차에서부터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투표 전날까지 평창은 1차에서 최소한 40표 초반, 많게는 중후반대까지 예상했다. 하지만 기대를 훨씬 밑도는 36표에 그쳤고 대신 잘츠부르크는 25표나 얻었다. 소치가 1차에서 얻은 34표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수준. 문제는 2차 결선이었다. 평창은 잘츠부르크의 표 가운데 절반, 아니 일부만 가져와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유럽은 아시아를 원하지 않았다. 1차에서 잘츠부르크를 지지했던 유럽 표 대부분이 소치에 대한 몰표로 이어졌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유럽은 아시아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결국 유럽의 지역주의에 진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푸틴의 힘’은 유치전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원맨쇼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의 국력을 보여주듯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유치전 내내 몸을 뻣뻣이 세웠다. 푸틴을 만나기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호텔 숙소와 리셉션장에 줄을 섰고, 푸틴은 투표 결과도 보지 않고 과테말라를 빠져나갔다. 결과를 예측한 듯한 행보였다.
정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푸틴의 힘은 돈의 힘”이란 말도 꺼냈다. 러시아의 막강한 오일달러를 두고 한 말이다.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기업인 가즈프롬은 서유럽에서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절반을 공급한다. 로비력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 측은 가즈프롬이 IOC의 공식 스폰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자랑했다.
◇작은 것 얻고 큰 것 내줬다=유치전에서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몰아주기 네거티브 선전’이었다. 우리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1년 대구 세계육상대회에 이어 평창까지 ‘트리플 크라운’을 누렸다. 하지만 국제 스포츠계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양대 스포츠 행사인 하계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가 명문 규정에는 없지만 대륙별 순환 개최의 관행을 고수하고 있고 특정 국가에 몰아주는 것을 금기시한다. ‘안배의 원리’가 IOC 위원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셈이다. 우리로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아시안게임과 육상대회를 가져온 대신 동계올림픽이라는 거대 이벤트를 내준 것이다.
◇전략의 실패 지적도=노무현 대통령은 사실 역대 어느 행사보다 열심히 뛰었다.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자정까지 30명에 이르는 IOC 위원들을 쉼없이 만났다. 부동표를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다. 평창이 졌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푸틴은 한 수 위였다. 푸틴이 만난 IOC 위원은 15명. 한 소식통은 푸틴이 만난 사람은 모두 잘츠부르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푸틴은 이미 2차로 갈 것을 예상, 잘츠부르크까지 감안한 전략적 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청와대가 낙관론에 빠져 있었던 것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이 동포간담회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치는 동안 푸틴과 러시아는 “실패하면 4년 뒤 다시 도전할 것”이라며 어두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 속으론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