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24일] <1378> 형평사


1923년 4월24일 경남 진주. 백정과 일부 양반 70여명이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 도모한다는 명분 아래 1935년 친일단체로 변질하기까지 12년 동안 활발하게 민족운동을 벌여온 형평사(衡平社)가 결성된 것이다. 취지는 천부인권과 만민평등. 갑오개혁(1894년)에서 백정제도가 없어지고 법적으로 양반과 상놈의 신분차별까지 사라졌지만 사회적 관습과 통념은 변하지 않는 현실을 타파해나가자는 데 백정은 물론 양반 출신 선각자들이 뜻을 합쳤다. 백정들은 무엇보다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자식들에게만큼은 차별 없는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는 절박함이 형평사운동에 불을 붙여 창립 1년 만에 12개 지사에 67개 분사를 거느리는 거대조직으로 커졌다. 취학률이 5% 남짓한 시절, 자녀 두셋 중 하나는 학교에 보낼 만큼 여력이 있었던 백정들의 경제력도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형평사는 환영 받았을까. 그 반대다. 진주의 농민 2,000명은 형평사 해산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쇠고기 판매점은 무조건 공격하고 불매운동도 병행했다. 백정과의 동석예배를 거부하는 교회도 없지 않았다. 백정들의 기부금으로 교사를 신축했던 학교의 교장이 백성 자녀들의 입학을 거부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일제의 방침은 수수방관. 형평사의 반제국주의 성향을 우려해서다. 압박과 견제 속에서도 형평사는 12년 동안 활발한 사업을 펼치며 신분제의 굴레를 부쉈다. 근대화의 자양분을 여기서 찾는 시각도 있다. 형평운동이 점화한 지 86년을 맞은 오늘날 사회는 과연 평등한가. 부는 물론 학력과 직업까지 대물림되는 현실을 조상들이 본다면 뭐라 할까. 진주성문 앞에 1996년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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