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까. 20세기 미국 자유민주주 정치철학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일반국민은 민주적인 권력을 자신들이 나누어 행사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을 뿐이다.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사람, 엘리트의 몫이다. 리프만은 언론인 출신 작가이자 정치 평론가. ‘냉전(Cold War)’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신자유주의도 태동시켰다. 1893년 9월23일, 뉴욕에서 해마다 유럽 가족여행을 다닐 만큼 부유한 유대계 독일 이민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하버드대에서 철학과 독일어ㆍ프랑스어를 공부한 뒤 1913년 잡지사 부주간으로 출발, 1차대전 중에는 윌슨 대통령의 자문관으로 일하며 민족자결주의, 국제연맹 창설 등을 담은 ‘14개 평화원칙’ 작성에 참여했다. 평론가로서,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그는 1938년 하이에크, 폰 미제스 등 석학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다. 목적은 대공황 타개책으로 등장한 케인스 이론과 수정자본주의에의 대항. 오늘날 세계를 흔들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배경인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태동했다. 1947년에는 저술을 통해 ‘냉전’이라는 용어도 만들었다. 대중의 여론은 왜곡된 정보에 따라 그릇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요즘도 곧잘 인용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때 그랬고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도 그랬다. 주로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에 동원된다. 정작 말년에는 언론의 사명을 강조했던 그는 은퇴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항상 가운데 서려고 노력했지만 40~50년 동안 내가 선 곳은 기득권 편이었다. 약하고 가난한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순간만 가운데 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