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비자금 항소심 판결문 <요약>

◇양형 이유=나라를 다스리는데 돈이 들고 정치를 하는데 돈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돈의 흐름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된다. 문제는 그 흐름의 통로와 분량을 적절한 경로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자금법, 기부금품모집금지법,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 등에서 그에 관한 공개와 통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 흐름을 벗어난 돈이 많다. 지상의 수로를 따라 흘러야 할 물이 지하의 미로로 흐르는 경우로, 정치자금 명목으로 주고 받는 뇌물이 그것이다. 그 책임은 지상의 수로를 막고 지하의 미로로 물길을 열어 놓은 사람이 져야 한다.지하의 통로가 열려있다 하여 그 곳으로 돈을 쏟아 부은 기업가들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의 이익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기업가들에게 열려있는 지하의 통로를 외면하고 지상의 수로가 개통되고 확장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결국 이번 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방식으로 돈을 바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권력층과 추종자들에게 있다. ◇금융실명제 위반(업무방해)=정태수·이경훈 피고인이 다른 사람의 비실명 예금계좌를 실명전환한 것이 금융기관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라고 판결한 원심은 잘못됐다. 금융기관은 겉으로 드러난 금융 거래자의 실명확인증표, 즉 주민등록증이나 사업자등록증만 확인하면 된다.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긴급명령에 금융기관이 반드시 거래자가 실소유자인지를 확인하도록 규정한 법조문의 근거가 없다. 또 금융기관에 공권력이 할 수 있는 자금출처의 조사 권한을 주는 것은 서비스업체인 금융기관의 성격상 맞지 않다. 자금출처의 조사 권한이 없으므로 자금의 실소유자인지를 확인할 방법도 없다. ◇뇌물성 여부=피고인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선거자금·성금으로 돈을 주었을 뿐 기업경영과 관련된 뇌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업체의 활동에 대해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의 직무권한을 기업인들이 의식한 상태에서 돈을 준 것이므로 뇌물이라 할 것이다. 또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에 따라 모금된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해도 뇌물에 해당한다. 돈의 수수가 비공식 단독면담에서 이뤄졌고 액수가 큰 점 등도 순수한 정치헌금이나 성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더군다나 피고인들이 돈세탁을 하고 변칙 회계처리를 한 것을 감안하면 뇌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갈죄 성립 여부=김우중 피고인은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정치자금 제공을 거부하였다가는 엄청난 위해를 받을 것이라는 공포때문에 돈을 주었으므로 공갈죄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기업경영과 관련된 경제정책을 결정·집행하고 금융·세제 등을 운용함에 있어 대우그룹이 다른 경쟁기업보다 우대를 받거나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의사를 갖고 돈을 준 것이므로 공갈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공소시효=정태수 피고인의 공소시효에 관련된 검찰의 공소 내용으로 볼때 시효의 완성 여부에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한다는 법리에 따라 정피고인의 뇌물공여죄는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피고인의 뇌물공여죄에 대해서는 더 심리할 필요없이 면소를 선고한다. ◇공소사실의 구체성 여부=최원석 피고인은 특정 사업과 관련,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바라고 돈을 건넨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전대통령은 동아건설이 발주한 공사에 대해 장관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노피고인이 최피고인을 위해 실제로 어떻게 관여하였는지에 대한 적시가 없다고 해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피고인은 또 이현우에게 준 돈이 국민학교 선배여서 경호실 운영비로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업인과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대통령 경호실장의 직무중 하나이므로 피고인이 대통령 면담 주선의 대가로 돈을 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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