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성(金民星)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음을 들었다. 지난 20년간 김 시인과 노소동락했던 풍류행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휘돌아갔다.이미 지난해 초여름 부안을 찾았을 때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쾌유를 빌기는 했지만 이렇게 해가 바뀌기 무섭게 앞으로 다시는 만날 기회를 빼앗길 줄은 몰랐기에 나의 슬픔은 더욱 진했다.
그의 아호는 범영(帆影). 시인다운 시인, 선비다운 선비, 풍류정신을 알았던 현세의 풍류사 김민성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그 `돛 그림자`가 머나먼 추억의 바다로 영영 흘러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 한국일보사 기자였을 때이다. 허균(許筠)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그가 한때 은거하며 `홍길동전`을 쓴 곳으로 추정되는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선계골 정사암터를 답사ㆍ취재하러 가서였다. 당시 그는 부안여중 교장이었다. 그는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닌 현세의 선비였을 뿐 아니라 정감 어린 시심을 지닌 시인이었으며 바른 역사관을 지닌 향토사학자이기도 했다. 이 고장이 낳은 빼어난 여성시인이며 명기였던 매창(梅窓) 이계생(李桂生)의 유적정화 등 기념사업을 사재까지 털어가며 앞장서서 벌이기도 했다.
그해 김 시인의 안내로 허균과 매창의 자취를 더듬는 취재를 마친 이후 서로의 저서를 주고받으며 해마다 부안을 찾았다. 해마다 한두차례씩 강릉ㆍ양양ㆍ속초를 찾아 동해의 절경 속에 취하듯, 해마다 부안을 찾아 변산 바닷가에서 서해 낙조의 황홀경을 즐겼던 것이다.
내가 술자리에서 “형님, 요즘 세상에는 유행가 가사보다도 못한 시를 지으며 시인 행세를 하는 인간이 너무 많아요!”하면 만면에 호인다운 웃음을 지으며 “동생, 그거 혹시 나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하던 김 시인이었다. 그리고 둘이 마주보며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대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승에서는 두번 다시 그를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는 내게 인생과 문단의 대선배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현들의 풍류정신을 이 풍진현세에서 이어가는 형제요,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한 까닭에 부안에 찾아가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변산의 명승ㆍ절경ㆍ고적들을 찾고 또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아아, 이제 부안을 찾으면 누구와 함께 채석강ㆍ적벽강ㆍ내소사ㆍ개암사를 찾아다니고 매창의 묘와 시비 앞에서 더불어 술잔을 기울여야 하나.
<황원갑(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