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에린 브로코비치'

얼굴이 아니라 연기력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배우는 역시 ‘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배우 중의 한 명이 줄리아 로버츠다. 금발, 큰 키, 매력적인 입. 출세작 ‘프리티 우먼’에서 그녀는 예쁘기는 했지만 사실 연기력은 별로였다. 그러나 양(量)은 질(質)을 담보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증명했다. 지난해 ‘노팅힐’ 이후 그녀는 이전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적 매력(물론 이것은 그녀의 나이를 감안한 시나리오의 승리이기는 하다)을 풍기면서 ‘연기자’로 거듭나려 노력중이다.‘에린 브로코비치’는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 그러나 이번에 줄리아는 돈많은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고졸, 두 번의 이혼, 세 명의 아이, 은행잔고 16달러. 그래도 하이힐 구두에 초미니 스커트를 즐겨입는 에린. 자동차 사고 재판에서 패소한 에린은 변호사 에드(앨버트 피니)를 찾아가 막무가내로 일을 요구하고 서류 정리 잡무를 맡게 된다. 그러다 대기업이 방류한 크롬 성분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634명 마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사상 최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꿈같은 얘기고, 또 다시 ‘미국식 정의’를 얘기한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부분은 에린과 남자 친구 조지(애런 에커트)의 관계. 오토바이를 타는 히피 조지는 고장난 배수관을 고치고, 아이들과 카드 놀이를 즐기며 아이들을 재운다. ‘반사회적’인 존재로 비쳐졌던 히피들의 새 가치관, 즉 돈을 벌수 있는 사람이 벌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정을 돌본다는 새 가정상을 제시하는 부분은 여성 관객들에겐 꽤나 매력적일 수 있다.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도 몸매 만큼은 아니지만 꽤 흡인력이 있다. 6일 개봉. 오락성 ★★★☆ 작품성 ★★★<★5개 만점, ☆은 절반. 한국일보 문화부 평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고군분투하는 에린 남편도 없이 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신용불량인 은행 계좌, 놀라울 정도로 천박스럽지만 지혜(사고에 대한 기억)를 가진 에린 브로코비치. 자동차 사고 때문에 찾아갔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도록 고용된 에린은 미국 생수 회사가 개입된 음울한 공중보건 관련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과연 법정의 수퍼스타가 될 것인가? 가능성은 충분하다. 승리를 거둔 줄리아 100퍼센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만 봐서는 웅장한 법정영화 부류 중에서도 최악의 케이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냈다. 태산같은 위선의 가면을 벗기려고 일어선 고귀한 시민이 순교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는 할리우드가 즐겨 사용하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존 트라볼타 주연, 스티븐 제일리언의<시빌 액션>이 바로 이 같은 시점을 선택해서 실패한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착한 에린의 도움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은 무서운 암에 걸려있어 눈물을 짜내는 무거운 장면들이 계속 이어질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끔찍한 영화라고나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상은 매우 빗나갔다.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또 하나의 영화인 마이클 만의<인사이더>처럼 스티븐 소더버그는 눈과 머리를 즐겁게 할 정도로 우아하게 모든 관습을 교묘히 피해가고 있다. 스펙터클한 효과나 눈물을 짜내기 위한 드라마틱한 과장, 끝없이 이어지는 재판 장면 대신에 이 감독은 여주인공의 조사 과정을 소박하게 영화에 담으면서 신경질적인 유머 감각과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있다. 미스 브로코비치가 악당들을 혼동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고 또 자르든, 악취 풍기는 늪에 손을 넣어 썩어가는 개구리를 끄집어내든(물이 전혀 맑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자신의 아이들을 이웃이자 마음씨 좋은 남자에게 맡기든, 소더버그는 시종일관 그녀를 통해 경쾌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데, 나중에 이것은 엄밀함과 정확성에 기반을 둔 미장센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유의 형식적 강점(리듬감과 적절하게 사용되는 생략법, 물 흐르듯 유연한 미장센)덕분에 최근에 독특한 누아르 영화를 연출해냈던 소더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3류 변호사, 폭주족 사회, 자기보다 형편이 약간 나은 사람들에게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로채려고 애쓰는 초라한 인간 등 평범한 인물들을 아주 맛깔스럽고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남은 것은 줄리아 로버츠, 스티븐 프리어즈의<메리 라일리>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좋은 감독을 만나면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이 자신에게 있음을 증명해 보여준다. 역할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뜨내기 배우 짓이나 과장되게 자극적으로 가슴이 패인 의상 등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여배우는 암시와 고식적인 심리적 수단에 의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영화 전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프리미어 제공 입력시간 2000/05/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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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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