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왜곡된 국내 산업 생태계

반도체 생산장비를 만드는 중소업체 A사 대표는 최근 한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부터 제품 납품을 제안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거부하기 힘든 좋은 기회였지만 그는 이를 과감히 거절하고 대만 업체와의 거래를 선택했다. 그간 다른 대기업과 거래하며 겪어야 했던 많은 어려움이 그 이유였다. 그는 "대기업 한 곳에 예속되면 도저히 다른 판로를 뚫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일단 한 기업과의 거래를 시작하면 생산량 대부분을 이 곳에만 납품해야 할 뿐, 다른 업체로 거래선을 확대하려면 '우리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라'는 식으로 일종의 '판매 제한'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이 같은 행동은 기술 유출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기보다는 협력업체의 기술을 독점하기 위한 '갑(甲)의 횡포'에 가깝다는 게 그를 포함한 많은 중소기업인들의 말이다. 수년에 걸쳐 독자 개발한 뛰어난 기술이 대기업에 종속돼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암울한 현실이 결국 A업체와 같은 사례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한발 비껴나 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정부가 펴 나가는 중소기업 지원책이 기업의 기술 개발에만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좋은 기술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대기업과의 관계 때문에 이후 다양한 판로를 확보해 성장하기 힘든 데도 이를 개선하려는 정부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한 정부 당직자는 "대기업의 행위는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할 수 있지만 확실한 불공정거래가 아닌 이상 잡아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납품관계는 본질적으로 사적인 두 법인 간의 거래인 데다 정작 이 같은 문제를 잡아내기 위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에 들어가면 대기업의 눈치 때문에 얘기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초부터 '대ㆍ중소기업 상생'을 부르짖던 정부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소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왜곡된 국내 산업생태계를 개선해 중소기업의 살길을 열어주는 것은 해당 기업의 성장을 도모할 뿐 아니라 내수를 키우고 '상생'을 도모하는 지름길임을 정부와 업계 모두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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